<본문>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4-8)
<설교>
인간에게는 자기 구원을 향한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껏 전달되어진 인간의 죄성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을 선으로 여기게 되고 보탬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기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하나님은 전혀 다른 생각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아들의 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피는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의 죄로 인해 흘리신 것이고, 피로 말미암아 멸망 받아야 할 자들을 용서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은 ‘과연 누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피의 은혜를 알며 감사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구원을 향한 욕망과 집착으로 무장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도 나의 구원을 위해, 지금 일하시는 것도 나의 구원과 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아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죄로 인해 피 흘리신 아들에게 관심이 있고 고마움이 있다면 아들을 피 흘리게 한 나의 죄에 대한 미움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죄를 좋아하면서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위선일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죄를 미워합니까? 죄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죄란 하나님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에 모든 관심이 자기 육신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내 육신이 잘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실 것 같습니까?
결국 우리는 은혜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천국으로 돌려놓기 위해 우리의 육신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징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징계는 죄지었기에 벌주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을 향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징계를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징계 받는다’는 말 자체를 싫어하기도 합니다. ‘징계 받는다’는 것은 죄지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죄 지었다’는 것은 신앙적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엉뚱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선벌악’이라는 상식 아래서 소위 잘되면 착해서 복 받은 것이고 못되면 범죄 한 것이 있어서 벌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이 교회 안에서 힘든 일을 겪는 사람에게 무작정 ‘회개하라’는 말을 들이밀게 되는 것입니다.
징계는 ‘죄 지었으니까 벌 받아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힘든 일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죄짓는 자가 되고 평안히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 편히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징계는 우리의 소원과 마음을 세상에 아닌 천국에 두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육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손해 보는 일이 있게 하셨다면 그것은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내린 벌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 그처럼 헛된 것이고 내 수중에 있는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며 그러기에 돈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고 돈을 바라보던 마음을 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두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징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손해 보게 해서 ‘내가 십일조를 안해서 이런 징계를 받았으니까 십일조를 잘하면 다시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 위해 징계를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징계를 벌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특히 6-8절의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는 내용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아들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길을 망하는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돌려놓기 위해 아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5절). 징계 받을 때 낙심하는 것은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잘 살았고 벌 받을 이유가 없는데 징계가 주어지니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답게 만들고 좋은 곳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낙심에서 벗어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쉽게 이해를 못하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만한 죄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에게서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혼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두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육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임을 알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닌 자에게는 징계가 없습니다. 그냥 살게 버려두십니다.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마음은 세상에 빠진 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이 편히 잘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할 이유가 없음을 압니다. 세상의 삶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징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내가 아들의 관계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징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징계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나의 마음을 고쳐서 하늘에 모든 소망을 두게 하시고 영원한 그 나라에 있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기에 그로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에서 해방된 자가 아닙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내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아들에게 두게 하시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일은 중지 되지 않고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의 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 자체가 신자에게는 고난인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대항함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없음을 뜻합니다. 피 흘리면서도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없기에 죄에 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끊임없이 징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는 신자된 자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의 기쁨은 나 같은 자를 사랑하셔서, 징계해서라도 영의 사람으로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이 기쁨이 없기에 피 흘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시고 그것이 기쁨이 되어 살아갈 수 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