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 히브리서 12:3 참으심

<본문>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2:3)

<설교>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충돌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람의 관심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생각이 달라 충돌되더라도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조율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타협과 양보와 조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사람의 관심을 받아들일 의도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거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나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충돌이 없다면, 내가 생각하고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또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이 만들어 낸 거짓 하나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관심에 들어오도록 하십니다. 사람의 관심에 끌려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를 못한다면 바른 신앙에 머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의 중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충돌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다면 누구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착각은 신은 인간이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원하는 우상에 불과할 뿐이며 성경에서는 그러한 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나의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으로 뒤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나의 중심에 있음을 발견할 때, 신자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절)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고 말하는 그분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2절에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3절에서는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심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이라는 단어에 우리의 관심거리 모두를 담아서 하나님께 요구하지만 복의 내용조차도 성경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것을 복의 내용으로 담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것을 복의 내용으로 담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관심이 깨어지지 않는 한 신앙은 철저히 내 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생각과 관심이 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묵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생이 없는 편안한 삶을 꿈꾸며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십니다. 즉 고난을 받으시되 모든 것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인간이 고생 없는 편한 인생을 꿈꾸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온통 자신의 생존 문제에 집착되어 있습니다. 진리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생존에 도움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인기 없는 분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인간에게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역시 무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 십자가에 나의 관심거리를 담아 놔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천국이든, 세상의 복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예수님만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세우시는 이유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우리의 고생은 사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쉽게 피곤해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 꿈꾸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곤과 낙심은 삶의 재미를 잃었음을 뜻합니다. 인간이 찾는 삶의 재미는 원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에 있는데 원하지도 않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어지게 되면 자연 삶의 재미가 사라지게 되고 그것이 피곤과 낙심으로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이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은 삶의 즐거움 자체가 달라져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삶의 즐거움이 온통 세상을 향해 있는 자에게는 참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피곤과 낙심만 있을 뿐입니다. 원하는 삶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의 즐거움을 하늘에 두게 된다면 세상에서의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피곤하고 낙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의 형편을 생각하면 사는 것이 피곤하게만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환경과 형편의 문제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세상의 것을 마음껏 누려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형편이 되지 못함을 생각할 때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지고 원망이 되기도 하면서, 자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달가운 마음이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삶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즐거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시선을 벗어버리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루속히 깨닫고 예수님이 바라본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즐거움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예수님의 의가 감사함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의의 현장인 십자가는 자연 내가 머물러야 할 신앙의 자리이며 따라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셨으니 너희도 참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요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라’는 강요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어떤 고난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내 뱉는 교훈적 차원의 발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단지 말일 뿐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맹목적으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즐거움이 고난을 참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즐거움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즐거움이 헛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고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참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피곤치 않고 낙심하지 않는 것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인생의 즐거움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헛됨을 가르칩니다. 육은 결국 멸망으로 끝날 뿐임을 말하면서 영원한 영의 문제를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육의 문제를 고집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있었던 즐거움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에게 있었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관심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고 나를 피곤하게 하고 낙심하게 했던 것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 되기를 소망하고 예수님의 참음이 나의 참음이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야 말로 새사람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