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1-2)
<설교>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사실 굳이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면 자연히 그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돈을 바라보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돈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좋은 것임을 알기에 돈을 바라보고 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해주는 돈을 바라보자’라는 말을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당연한 말을 왜 하는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보자’라는 말은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미 바라보며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바라보자’라는 말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 바라보는 자가 있고 바라보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바라보자’는 말은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는 역시 불필요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2절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당연한 말로 여기고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2절은 다만 당연한 내용으로 여겨질 뿐, 자신을 책망하고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가는 내용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불필요한 말일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은 세상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음을 전제로 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쩌면 저의 이 말에 대해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열심이 있고, 믿음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잘못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증거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바라보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여기는 것은 믿음의 능력이 아닌 믿음의 모양을 보고 내리는 자기 판단일 뿐입니다. 믿음이라고 여기는 겉모양에 의해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결론은 누구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관심 두지 않는 것, 육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영의 문제를 위해 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거짓 예수인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고, 문제를 해결해주고, 재앙을 미리 막아주는 그런 예수가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좋다고 할 것입니다. 왜 좋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 대신 죽어서 내가 천국가게 돼서 좋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셔서 좋은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실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좋은 분과 함께라면 못갈 곳이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 보내주는 예수도 좋고 병 낫게 하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주는 예수도 좋은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를 기대하고 좋아하는 것이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11:40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여러분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좋은 것은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구미에 맞습니까?
여러분의 욕망과 상관없이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안 사도 바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과연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서는 등을 돌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을 비워 버리고 무너뜨림으로써 세상에서 끌어내기 위해 오신 분임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어떤 증거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고 하는 일도 형통함을 증거합니까? 믿고 기도하면 병을 낫는다는 증거를 합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사도들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사도들이 병을 고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 고침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병을 고쳤다고 해서 민중들에게 ‘예수 믿으면 나처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병 고침은 자신들의 일이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 연속성 가운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관심이 엉뚱한데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아닌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 있는 해결사 하나를 붙들려고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고 죽으시는데, 그 앞에서 내 병 타령이나 하고 있고 복 받아서 돈 벌게 해달라는 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웃기는 일 아닙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피 흘리시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아예 관심거리도 되지 않기에 그런 요구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교회라고 하는 집단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태에서 우리라고 예외겠습니까? 입 밖으로 내 뱉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에는 나의 이익을 기대하는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천국 근처에도 가지 못할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온통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을 감추려는 위장술에 능수능란한 우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실태를 깊이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악의 함정에 빠진 것이 나의 실태임을 발견할 때, 그리고 무엇으로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할 때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예수님의 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의 의의 공로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 그야말로 세상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좋은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여러분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악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마시고, 믿음이 나를 다스리고 고쳐가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원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나 역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믿음으로 인도를 받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게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증인들을 보면 됩니다. ‘믿음으로 이렇게 살았더니 이런 복을 받았다’는 간증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지 마시고 믿음에 이끌려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한 영광이 너무 좋아서 세상의 영광을 외면하는 길로 갔던 증인들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 즉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은 하늘에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란 이러한 예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즐거움에 나 역시 참여되기를 소원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은 우리가 원하는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인한 즐거움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세상에서의 모든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고난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예수님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예수를 이름을 빌어서 자기 욕망을 채워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욕망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서의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늘에서의 즐거움을 위해 잠시 세상에서의 고난과 부끄러움을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이분을 바라보고 사는 그가 바로 목자의 음성을 아는 참된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