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브리서 11:31)
<설교>
천국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누가 들어가느냐는 것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있을 때 그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는가를 살핌으로써 답을 찾아가게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이 라합의 구원을 말하면서 그점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이방여인이었고, 기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라합이 구원 받았음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합이 어떻게 해서 순종치 아니한 그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는가를 언급함으로써 천국이 어떤 방식, 그리고 어떤 기준과 원리에 의해 들어가게 되는가를 말하고자 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주는 방식대로 잘 실천해서 천국에 갈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에서 생각하고 궁리한 방식들로는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천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님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을 말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기 십상입니다. ‘내가 영생을 얻을 만한 사람인가? 내가 죄 지은 것이 있는데 그래도 천국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쉽게 빠집니다. 영생의 근거와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우리의 그 어떤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겔 37:4-6절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으로 덮여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마른 뼈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말씀한 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구원의 은총이 우리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죽은 자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방식이고 구원 얻은 자는 이것을 압니다. 나는 마른 뼈에 불과할 뿐이며 그러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 뭘 할까?’라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고 잘못된 것입니다. 마른 뼈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른 뼈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른 뼈의 마른 뼈다움,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영생에 이르게 됨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의 경우를 보면 마치 라합이 구원을 얻은 이유가 정탐꾼을 살려준 것처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합에게 정탐꾼이 오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합에게 정탐꾼이 오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구언의 원인을 라합의 행위에 둔다면 이런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합이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정탐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탐꾼을 라합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향한 라합의 믿음이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라합의 행위가 아니라 정탐꾼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는 것은 마른 뼈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른 뼈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상태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살이 생기게 하고 힘줄이 돋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라합이 정탐꾼을 만났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숨겨줬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행동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결국 초점을 라합의 행위에 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라합의 행동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이렇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규범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도덕과 윤리, 의지로 인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의 동족은 배신하고 대신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습니다. 라합이 왜 이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아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발각이 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은 뻔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탐꾼을 도운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음을 뜻합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나라를 버리는 것은 자신의 모든 터전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라합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멸망의 나라에서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참여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정탐꾼을 도와준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생명을 향한 믿음이 라합을 이렇게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라합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금 참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그 길로 가도록 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내가 믿음이 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믿음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라합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라합의 이러한 믿음은 오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우리들 앞에 세워진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눅 14:26절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의 형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신자가 가질 수 있는 갈등은 ‘예수를 믿었는데도 왜 이런 일이 있는가?’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편안함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은 커녕 죽음이 기다리는 상황에 놓일 때 믿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갈등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는 이런 상황의 신자에게 믿음의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믿음의 사람들을 어떤 길로 이끌어 갔는가를 언급함으로써 고난은 믿음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의 민족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아야 할 나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길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라합에게 정탐꾼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정탐꾼을 보내시고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세상의 멸망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멸망의 세계 속에서 함께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신자이기에 예수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관계는 포기할 수 없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