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 히브리서 7:1-3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본문>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브리서 7:1-3)

<설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맹세하시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은 신자에게는 큰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도 은총으로 주어진 믿음을 보존하고 수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는 말씀에서 이미 확인을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위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항상 연약함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천국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자임을 자인하게 됩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까지 거짓된 것이 아닐까 의심해야 할 정도로 우리 안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실력으로는 천국은 어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약속하시고 맹세로 보증까지 하셨다는 말씀이야 말로 든든한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를 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에 있어서 ‘예수 믿고 구원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에는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과 어려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러한 신자를 향해 쓰여진 것입니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향한 세상의 위로는 ‘조금만 참으면 다 잘될 거야’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다’는 수준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위로의 전부입니다. 교회 역시 이런 수준의 위로를 남발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복으로 바꿔주신다’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그러한 위로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중지됨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도록 합니다. 즉 신자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의 맹세를 자기 백성을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멜기세덱 제사장을 등장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겐 무척 생소합니다. 자주 언급된 인물이 아니라 창 14장과 시 110편 히브리서, 이렇게 잠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상으로는 아주 중요합니다.

1절을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왕을 겸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왕이며 제사장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을 방불케 하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빌었습니다. 7절에서 말씀한 대로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빔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도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멜기세덱 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같이 하는 것은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예수님의 우월성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여러분이 모두 인정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예수님이 높으신 분이고 우월하신 분임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믿는다면, 한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섬기는가?’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예수님을 높으신 분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는 2절의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복을 빌자 아브라함은 롯을 잡아간 자들과 전쟁하여 탈취한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임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즉 탈취물은 아브라함의 실력의 대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의와 평강이 멜기세덱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의와 평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2:17절에서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의와 평강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고 죄와 사망에 건짐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평강의 나라에 거하게 되는 모든 일이 오직 제사장 사역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의지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는 세상의 어떤 의보다 우월합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의를 믿는 그 믿음은 우리의 모든 의에 대해 눈길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열심도 행함도 높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우월하신 의로움이 나를 살렸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으신 분이라고 아무리 떠든다고 해도 인간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고 가치있게 보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하시고 높으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의와 평강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나눔 받은 의로 인해 영원한 평강의 나라에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주님만 믿고 의지하기를 소원하는 그 사람이야 말로 진심으로 예수님을 높이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