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히브리서 6:1-3 완전한데 나아가라

<본문>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브리서 6:1-3)

<설교>

제사장은 세상에서 인식하는 소위 높은 지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목사들 가운데 목사직을 제사장 직과 동일시하면서 섬김을 받아야 하고 높임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사장 직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즉 스스로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증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신자를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 역시 신자의 지위를 격상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신자가 어떤 위치와 역할의 자리에 있는가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신자란 제사장처럼 희생하고 섬기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섬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섬기는 분으로 신자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자신을 세워주기를 원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불러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 못마땅할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우리를 있게 하신다는 것이 싫은 이것이야 말로 ‘도의 초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버려야 할 도의 초보로서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것이 버려야 할 것들로 여겨지십니다. 버려야 할 것이기는 커녕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것들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모든 것을 도의 초보로 규정하며 버려야 할 것들로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회개를 하라고 강조를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회개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 신앙은 굳건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 역시 도의 초보로 말하면서 버려야 할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회개’를 버리라는 말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라는 말도 세례와 심판에 관한 교훈을 버리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도의 초보로 말하면서 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우선 도의 초보는 행위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도의 초보로 규정되는 행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도의 초보로 규정되는 행위가 있다면 결국 회개, 세례, 신앙 이 모든 것이 도의 초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도의 초보를 왜 관심의 문제로 봐야 하는가 하면 참된 복음의 내용과 부딪히게 되는 원인이 관심 밖의 내용들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즉 십자가는 믿겠지만 십자가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를 말하면서 좁은 길을 가야 하고,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미움을 받아야 함을 얘기할 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심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반발하기를 성경에 꼭 고난과 희생만이 있는가? 복도 있고 평안도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즉 성경을 자신의 관심과 일치 된 내용을 끌어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의 초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내가 잘되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이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어코 신자는 잘돼야 한다는 고집만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회개를 한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한 회개를 하게 될까요? 회개를 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회개를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수단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벌을 미연에 차단하고나 회개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고 벌을 피하자는 노림수를 갖고 있는 이것이 바로 도의 초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회개를 동원하는 그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둔 신앙이야 말로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받기를 원하는 신앙이라면 도의 초보일 뿐이며 버려야 할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도의 초보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은 완전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완전한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세상 어디에 완전한 곳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곳이란 구원의 의미에서 완전함을 뜻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모자람도 부족함도 없는 그곳이 바로 완전한 곳입니다. 그곳은 의가 넘치는 곳입니다. 때문에 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리스도 안이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100%완전한 곳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의심이나 불안감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완전한 곳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뭐가 보태야 할 것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완전한 곳에 거하기 때문에 복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구원을 얻기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때문에 완전한데 거하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태도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행위를 보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늘의 복에 거한다는 이 사실이야 말로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가 이것을 깨달을 때 ‘이게 웬 은혜입니까?’라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의 초점을 자신에게 두면 안됩니다. 믿음은 나의 구원용으로 선물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구원용으로 주어졌다면 믿음 이후의 문제가 곤란하게 됩니다. 때문에 구원 이후의 문제가 단순히 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전락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덕을 세상에 선전하고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구원은 이 일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구원용으로 여기기 때문에 나만 잘하고 천국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단지 신앙의 열심의 모습으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말합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을 한 후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것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문제이고 허락의 문제이지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안에 거하고 있는 인생인데 잘한 것이 있어서 복을 받고 잘한 것이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않기에 ‘내가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 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뭘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별 짓을 다해봐야 믿음 없는 자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됩니다. 믿음 덕분에 잘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인간이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덕분 아닙니까? 때문에 말하려면 ‘하나님이 잘하신다’라고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완전한데 나아간 신자는 완전한 생각을 하며 살게 됩니다. 완전한 생각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흠없는 완전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러한 생각으로 사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자리까지 인도하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완전한 분과 함께한 신자답게 완전한 생각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완전한 분과 함께 한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