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히브리서 3:15-19 누구에게 노하셨는가?
<본문>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브리서 3:15-19)
<설교>
15절에 보면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든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하나님을 노하게 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노하시고 격동하시는 대상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자에게 노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도를 안하고 성경도 보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교회 봉사에 게으른 사람입니까?
현대 교인들이 피하지 못하는 실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고 순종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노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앞세워서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제대로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노하시고 격동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가졌던 강퍅과 같은 강퍅함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노를 발하게 하고 격동케 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예로 들어 말하는 것은 히브리서를 받는 신자들의 형편이 마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고난과 어려움에 있는 신자를 향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고난과 어려움의 환경에서 마음의 강퍅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격동케 하고 노하게 하셨기 때문에 같은 형편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들을 살피고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움과 고난의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스라엘처럼 마음의 강퍅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강퍅은 과연 무엇입니까? 마음이 강퍅하다고 해서 성질이 고약하다거나 난폭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강퍅의 의미는 성격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것이 있다면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 한 것입니다. 민수기 11;18절에 보면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자신들의 형편에 대해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기를 주신 것은 단순히 거기를 먹고 싶어하니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고기를 마음껏 먹었을 때 하나님을 섬기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믿음에 대해 환경과 형편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잘살게만 하시면 하나님만 섬길 자신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즉 지금의 자신의 믿음의 문제를 환경과 형편에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열악한 환경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를 못한다는 논리가 되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어려움과 고통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복된 삶입니다. 즉 믿음의 결과로 복이 주어지고 그 복으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좀 더 열심히 잘 믿어 보고자 애를 쓰기도 합니다. 열심히 믿는 것이 복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떡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본래적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고난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2-3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덕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여 하심이니라”
광야 사십년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이스라엘이 배워야 했던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입니다. 하나님은 떡을 주시기 위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르치시고 그러한 삶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계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은 떡으로만 사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은혜의 땅입니다. 은혜의 땅에서의 삶은 방식은 애굽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광야의 세월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떡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애굽에서 구출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나 광야에서나 동일하게 떡을 원하고 있고 떡을 구하는 이것이야 말로 마음의 강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떡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나라에 영원히 있도록 하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떡의 문제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떡으로만 살아가는 세상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고 있다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리의 길을 바라보고 그 길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합니까? 물론 하나님은 세상의 삶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필요한 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의 문제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구할 것이 아니라 필요대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부족하다 여겨질지라도 그 부족함에서 하늘의 것으로 충만함을 누리는 믿음의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떡을 구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을 떡을 위해 존재하는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말씀보다는 떡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떡만을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이 소원을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격동케 하고 노하시게 하는 마음의 강퍅인 것입니다.
여러분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분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들을 고난과 어려움에서 40년간 지내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 가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섬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동케 할 뿐입니다. 때문에 ‘내가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겠지’라는 노림수가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을 격동케 하는 것이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는 곳이 어떤 나라인가를 몰랐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기보다는 자신들이 머물렀었던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셔서 우리를 구출하신 것이 어떤 곳이며 우리를 새롭게 들어가게 하고자 하시는 나라가 어떤 곳임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애굽의 삶을 그리워하고 애굽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강퍅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에서 낮아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힘든 세상의 삶에서 강퍅한 마음에 머물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고 그 힘을 구하는 것이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우리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