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3:12-16 다윗의 아내

<본문>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설교>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에 대해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세상을 잠시 머물렀다 떠날 곳으로 보게 되면 사실 세상의 짐이라는 것은 없게 될 것입니다. 고생을 한다 해도 잠시 동안의 것으로 여겨진다면 인내할 수 있을 것이고, 풍족히 산다고 해도 그 역시 잠시 동안의 것으로 보게 된다면 풍족함을 의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단지 하나의 희망사항으로만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로 사는 것은 희망사항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이루어야 할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생은 나그네임을 인정하고, 또 그런 삶이되기를 원하면서도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지를 못할까요? 그것은 끊어버릴 수 없는 우리의 육신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기에 욕망이 발생하고 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못한 우리의 욕망은 육신을 벗을 때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끊으라 해도 끊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욕망을 끊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욕망을 끊어버릴 수 없는 육신을 벗는 날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부터 구출하여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광된 몸으로 덧입고 살아갈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리고 사모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여러분의 욕망을 다스릴 것이고, 세상에 대한 시각도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벗는 날을 사모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것으로 마음껏 육신을 치장하고 싶은 욕망에만 머물러 있으니 신앙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은 우리의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광된 몸을 입고 영원한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마치 소풍갈 날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마음이 설레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그 날을 기다린다면 이런 마음이 되어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도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부르실 그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를 신부로 삼으신 예수님이 이제 불러주시고 혼인잔치에 이끄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나그네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첩인 리스바를 통간한 아브넬을 이스보셋이 책망을 하자 아브넬이 분노하여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로 옮겨 버리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스보셋은 이러한 아브넬의 협박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아브넬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권력이 없다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있는 자가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는 모든 자가 약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강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강하신 분이기에 모든 사람이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자, 권세 잡은 자를 보면서 거기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 역시 힘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억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힘을 소유해서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신자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12절에 보면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아브넬이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사울의 땅을 넘겨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아마 사울의 땅을 다윗에게 넘겨주고 대신 자신의 위치를 보장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13절)고 말합니다. 아브넬과 언약을 하는 대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올 것을 조건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의 처 미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이 미갈의 남편인 발디엘에게서 빼앗아서 다윗에게로 돌려보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을 어떻게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비록 미갈이 예전에 다윗의 아내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엄연히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깨버리고 다시 예전의 부부의 관계로 돌이키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의 행위를 두고 우리는 ‘다윗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우리의 상식과 도덕으로 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본문을 절대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우리의 상식과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두가 하늘의 일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일을 세상의 상식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역시 도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도덕으로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하늘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미갈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에서는 그 이유를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는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나와 정혼한 여자라는 것입니다. 정혼한 여자이기에 신부로 삼겠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죽은 후에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울의 첩인 리스바이고, 또 하나는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두 여인 모두 사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죽자 한 여인은 아브넬이라는 힘에 의해 짓밟힙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여인 미갈은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운명으로 들어가게 된 두 여인을 통해 오늘 우리들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기 위해 다윗을 자신의 사위로 삼겠다고 하면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요구합니다. 그러 다윗은 양피 일백을 사울에게 주고 미갈을 아내로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5:44절을 보면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준 것은 다윗에 대한 미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원래는 다윗의 아내였으나 사울에 의해 발디엘의 아내가 된 미갈이 다시 다윗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장차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혼자였던 미갈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아내로 되찾습니다. 비록 자신의 아내라고 해도 지금은 이미 남의 남자의 아내가 된 미갈입니다. 그럼 미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정혼자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을 예수님으로 비유한다면 미갈은 바로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무엇을 말해주는 내용인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갈이 비록 다윗과 정혼한 신분이지만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정혼한 몸으로서 다윗과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신자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는 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윗이 미갈을 찾지 않았다면 평생을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갈처럼 신자 역시 예수님이 찾아주지 않으신다면 그 운명은 세상과 함께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언약대로 자기 신부를 찾으실 것임을 본문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미갈이 다윗의 아내로 다시 회복되는 것은 정혼이라는 언약 때문입니다. 한번 다윗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미갈이 어떤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한번 부름 받은 예수님의 신부라는 위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불변성 때문에 신자의 구원은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신실성, 불변성이 우리의 미래를 굳게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으면 됩니다.

믿음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부답게 신랑을 위해 뭔가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미갈이 다윗에게 돌아가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갔을 뿐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내라는 신분을 사모하면서 그 신분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다윗이 미갈을 기억하여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미갈에게는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불러주고 아내로 삼는 다윗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바로 이 고마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갈의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자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지만 과연 우리 스스로를 예수님의 신부답게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정결을 지키며 신부로서의 깨끗함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그런 자부심을 드러내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의 신랑이 누구인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고, 내가 누구와 정혼한 신부인가를 잊어버리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사랑스러운 것들을 마치 남편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버림받아도 사실 할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정혼하신 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신부로 정혼한 자들을 부르시고 혼인잔치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대로 우리의 행함이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언약이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8절에 보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언약은 피로써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 언약으로 인해 여러분이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처지나 행실로서는 도저히 구언을 바라볼 수도 없는데 피로 세운 언약을 기억하사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다면 분명 세상에서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예 잊고 사는 것과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면서 장차 주어질 복된 신분을 사모하며 사는 삶이 같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치우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처지가 미갈이었으며 그런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피의 언약의 고마움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깨닫고 장차 신랑으로 다시 오시며 신부된 우리를 불러주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졸지에 아내를 잃어버린 미갈의 남편 발디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6절에 보면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고 말합니다. 울면서 미갈을 따라온 것을 보면 미갈을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다윗에 의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실 그때는 세상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깨어질 것입니다. 오직 다윗의 신부와 세상의 사람으로만 남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십시오. 세상은 의지할 것이 없으며 또한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사는 곳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원히 거할 곳은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예수님이 우리를 신부로 불러주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