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강) 사무엘하 24:18-25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본문>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사무엘하 24:18-25)

<설교>

하나님의 징계는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이끄시기 위함인 것을 지난 시간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서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온역을 통하여 삼일 동안 칠만 명의 백성을 죽게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계수한 것이 하나님께 왜 죄가 되는가를 깨닫게 하시고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으로부터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낸 하나님은 본문에서 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단을 쌓으라는 것은 곧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사에는 필히 제물의 희생이 있습니다. 즉 다윗이 단을 쌓는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고 죽는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의 마지막 구절인 25절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멈추게 한 번제와 화목제가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던 재앙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재앙을 대신 담당한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재앙이 멈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지던 이스라엘의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결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고스란히 멸망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독생자 아들에게 대신 쏟으심으로써 우리에게는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물의 희생,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친히 제물 되신 예수님의 의의 행위에 대한 감사함과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나를 향한 진노를 멈추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기 위해 올라갑니다(19절). 아라우나는 다윗과 그 신복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하며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하고 아라우나는 자신에게는 제물로 쓸 소가 있고 땔나무까지 모두 있다고 하면서 그 모두를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24절)는 말로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다윗은 단을 쌓을 타작마당과 제물과 땔나무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굳이 값을 지불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굳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을 것을 지시한 이유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역대하 3: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 타작마당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을 대신 제물을 삼고 이삭을 살리신 일도 있습니다. 또한 16절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멈추게 하실 때 백성을 멸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라우나의 타작마당과 연관된 이 모든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제물을 대신하여 죽이시고 이삭을 살리신 사건이 있었고, 사무엘하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멈춘 곳임을 생각해 볼 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시고 죽을 자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단을 쌓으라고 하시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된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성전으로 나타난 것이고,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친히 제물 되신 분이고, 성전이시고, 우리의 모든 재앙을 온 몸으로 받으시고 우리를 건지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상 22:1절을 보면 다윗은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며 이스라엘의 번제단은 사람의 손으로 세운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산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때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구한 일이 있습니다(창23장) 그때 헷 사람은 호의를 베풀어서 묘실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장례는 단순히 죽은 자를 장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잉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약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오직 언약으로만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헷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헷 사람이 자신들의 호의를 내세우며 아브라함의 세계에 끼어들 그 어떤 여지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값을 치르고 산 이유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곳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희생 제물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타작마당에 아라우나의 호의가 끼어든다면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에 인간의 행위가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사전에 이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의 세계는 제물의 의의 희생만이 있을 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드려짐으로써 백성들에게 내려진 제사가 그쳤다는 것은, 말 그대로 멸망했어야 할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희생이 함께 하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가운데 있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예수님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께 나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입었을 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꼭 보답을 하겠다’는 말을 주로 합니다. 이것은 받은 은혜를 나중에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도움을 받았을 때는 ‘나중에 갚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중에 갚겠다는 말 자체가 상대방이 베푼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고 말하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여기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 예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부어지는 진노를 예수님이 홀로 담당하셨다는 것에 대해 시큰둥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악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 또한 가벼운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히 9:15절을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함도, 열심도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지를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보증이 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만을 바라본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심이 부르신 자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자기 행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열심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했다’는 말은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우리의 중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신 근거는 번제와 화목제에 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행위를 보시고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희생이 담긴 기도만을 들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희생이 담긴 기도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뜻을 기도라는 형식에 담아서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가 오늘 우리가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진노가 무엇 때문에 멈추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자신의 죄의 깊이에서 깨달으면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