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강) 사무엘하 24:11-17 하나님의 징계

<본문>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사무엘하 24:11-17)

<설교>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통계청에서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지만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국가 운영 차원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일을 두고 범죄한 것으로 말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범죄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위치에 있는 신자로서 주지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범죄로 규정되는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자신이 다스리는 자신의 나라로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내 나라이기에 인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범죄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내용을 다윗더러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하셨다 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세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가 이스라엘 땅에 칠년 기근이 있는 것, 둘째는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것, 세 번째는 이스라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13절)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세 가지의 징계를 보면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면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에 대해 어떻게 답합니까? 14절을 보면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는 답을 합니다.

다윗의 답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징계를 선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범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징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징계를 통해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즉 벌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징계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징계가 조금이라도 내게 유리하고 가벼운 것일까?’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셋을 주고 계산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징계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징계를 두고 어느 것이 자신에게 조금 이라도 더 유리한 것인가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을 할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어느 것으로 내려지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징계를 고통의 의미로 바라보기보다는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긍휼에 빠지게 하시는 은총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것은 ‘벌’의 개념입니다. 벌이라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에서 고통과 아픔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하나님 징계를 받지 않을 길은 없습니까? 회개하면 됩니까?’라는 식으로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윗은 세 번째인 온역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는 내용을 보면, 삼일동안의 온역으로 인해 백성이 칠만 명이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삼일 간 온역이 있는 이 징계가 다윗을 하나님의 긍휼로 끌어가는 징계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온역의 징계가 다윗을 여호와의 긍휼耖네 빠지게 하는 징계가 되겠습니까?

다윗의 범죄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인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일의 온역으로 인해 칠 만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이 죽습니다. 만약 온역이 삼십일이었다면, 일 년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힘으로 여긴 수십만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겠습니까? 결국 온역의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다윗이 계수한 수많은 백성들도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께 달린 것이고, 여호와의 긍휼이 그들을 살리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수가 많고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온역의 징계를 통해서 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이 우늘 우리들의 속마음 깊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원하는 것은 많은 교인입니다. 많은 교인을 교회의 힘으로 여기는 것이고,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써 그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위상이 높여질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힘도 조건도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수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하나님이 흩어버릴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로 모이는 신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7절을 보면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칠만 명의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치기를 원합니다. 결국 다윗은 백성의 죽음을 보면서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죄도 없이 애매하게 죽은 것입니까?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진노하셨음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의지할 것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된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 그 속에 있는가를 보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진 사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징계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죄지었으니 벌 받아라’가 아니라 죄를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기 존재성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징계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수단이고 도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