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강) 사무엘하 24:2-10 다윗의 인구조사

<본문>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우편 곧 야셀 맞은편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서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편으로 나와서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저희 무리가 국중을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인구 도수를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 만이었더라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사무엘하 24:1-10)

<설교>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마치 끝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중지됨도 없고 사그라짐도 없이 인간이 숨을 쉬며 육체로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고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욕망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게 합니다. 채워짐이 없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신을 찾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탐심이 있는 인간, 즉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거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담이후로 어느 누구도 욕망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무지 이러한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보신다느니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만의 종교 생활에 심취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서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존재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인간의 욕망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욕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바로 이런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독생자 예수님만이 생명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의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압에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절의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하시는데 그 일을 위해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게 했다는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게 했다는, 즉 하나님이 다윗에게 죄를 범하게 했다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대상 21:1절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즉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은 사단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으로 말하는 것은, 서로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결국 다윗이 범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인데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도 죄를 물어서 진노하시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25절을 보면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재앙이 무엇으로 그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이 그치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을 번제와 화목제로 끌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번제와 화목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가기 위해 우리의 범죄를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속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을 두고 과연 범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인구조사 자체를 두고 죄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 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이 인구를 계수하라는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 계수한 것이 죄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구조사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죄는 인구를 조사한 목적에서 찾아야 함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이것을 보면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고자 한 것은 많은 수의 군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이 힘있는 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많은 수를 힘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연결된 인구조사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숫자에 민감합니다. 우리도 많은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기도해도 항상 많게 해달라는 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재정도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예배당도 큰 것을 원하고, 이렇게 작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교인의 수를 헤아리고 돈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여 수를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승리는 용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용사의 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용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용사의 많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교회는 공동의회를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의 결산과 올해의 예산을 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목사들이 만나면 서로에게 올해 예산이 얼마인가를 묻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크기를 비교하고 많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한 것처럼 사단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을 격동합니다. 많은 수로 인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게 하고, 적은 수로 인해서는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고 실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가지고 인간을 격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힘을 구하라는 방식으로 격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격동에 의해서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숫자를 바라보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수의 많고 적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가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일 뿐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잘되는 것을 많아지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잘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천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과, 두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아마 어느 한쪽을 두고 이것이 낫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모이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한 것 말입니다.

그러면 천 사람의 모임에 예수님이 함께 한 것과 두 사람의 모임이 함께 하신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경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동일하다면 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모임이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항상 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속에서 욕망이 우리를 격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욕망이 격동하기에 무엇에 대해서도 만족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인구수를 조사한 것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련함을 고하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범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음에 자책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격동당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미련함을 보지 못하고 죄를 보지 못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욕망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구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윗을 나무라는 요압의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일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