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 사무엘하 23:13-17 다윗의 경솔함

<본문>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사무엘하 23:13-17)

<설교>

지난 시간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용사들이 있음으로 그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고 큰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으며 결국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들임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살아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러니 너희들의 힘으로 산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가 강하게 살아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말 앞에서는 물거품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인도하신다는데 그 앞에서 우리의 힘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이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가 없고,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뭉쳐 있지만, 그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세상이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단의 사고방식이 버젓이 교회에 자리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교회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에 의한 말일까요? 아니면 교회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대하며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을 할까요? 대부분은 후자의 의미를 가지고 ‘맡긴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속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에 ‘예’하십니까? 혹 앞에서는 ‘예’하면서도 돌아서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까? 아예 ‘예’하면서도 속에는 다른 것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이로운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 있어서 겸손해야 합니다. ‘건강하니까’ ‘돈이 있으니까’ ‘든든한 직장이 있으니까’ ‘아직 젊으니까’라는 생각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희생과 수고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이득만을 꾀한다는 것이 왜 악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에게 있었던 한 일화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14-15절을 보면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라는 말을 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베들레헴을 점령해 있는 상태에서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을 사모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말은 목이 말라 물이 마시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로 인한 말이었습니다. 단지 목이 말랐기 때문이라면 굳이 베들레헴의 물을 그리워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말을 들은 삼십 두목 중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다윗이 원하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오게 됩니다. 자기의 목숨을 내건 충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을 높이기 위해 다윗의 이러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희생과 수고를 생각하지 않은 다윗의 이기적인 모습과 자신의 그러한 이기적인 모습을 깨달은 다윗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윗의 이기적인 모습은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감당해야 할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블레셋에게 점령당한 것을 다윗이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한 곳으로 침투하여 물을 길러 온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고향 땅의 물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내 놓을 줄만 알았지 자신으로 인해 겪어야 할 용사들의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세 용사가 길러 온 물을 받고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16-17절에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세 용사가 길러온 물을 감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자신이 마실 수 없다고 여긴 다윗이 여호와께로 돌려드린 것입니다. 세 사람의 수고와 희생과 피를 받으실만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경솔함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역시 다윗과 같은 경솔함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솔함은 타인의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생각과, 입장과,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은 누군가가 가서 고향의 물을 길러 오기를 원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즉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물을 마시고 싶은 자신의 심정만을 고려했을 뿐, 물을 길러 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목숨을 거는 희생과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용사들 앞에서 그런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은 것은 어쩌면 다윗은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사들을 세워 승리하게 하신 것도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용사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자신의 곁에 있는 용사들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그리워하며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을 담고 있는 다윗의 경솔함은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경솔함은 우리에게서도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가장 흔한 모습을 예로 들어 본다면 교회가 신자들의 희생과 수고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언급한다면 목사가 교회를 빙자하여 교인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사람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를 위해 일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교회를 위하고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신자가 아니라 교회 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결국 교회라는 단체를 신자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놓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충성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같은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교회를 위한 희생과 충성을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도 이점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를 그리스도의 양이라고 부르고 목사의 위치에 있는 자신을 그 양을 치는 목자로 일컬으면서 신자의 위에 존재하고, 마치 다윗이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것처럼 소위 목사의 목회를 위해 신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목사의 이기심이여 엄청난 경솔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인이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는 목사도 간혹 볼 수가 있는데, 그런 모습이 저를 답답하게 합니다. 신자란 목사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교회를 자신의 소유개념에서 생각하는 착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목사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목사의 말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목사의 말이 여러분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목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바라보게 하고, 세상을 향한 탐욕으로 채워가고, 잘살고 건강한 복 아닌 복으로 끌어가는 것이라면 온 힘을 다해 거부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교회든 목사든 신자의 희생과 수고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 역시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이기심으로 살아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심과 경솔함이 그리스도를 향해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날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에 대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하지만 당연한 것에 대한 의례적인 감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죄로 인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날 도와 달라’는 요구를 망설이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지 않는 결과인 것입니다.

다윗은 용사가 떠온 물을 바라보면서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라고 하며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다윗이 타인의 희생과 수고, 즉 피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수고와 피는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용사가 길러 온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피를 이용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며 피를 높이고자 하는 것보다는 피로 인해서 내가 구원 받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일 뿐이지 우리가 구원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 했다’며 자신의 구원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피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피 흘림과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악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이 나를 새로운 생명에 있게 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의 희생과 수고로 도움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