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강) 사무엘하 23:1-7 다윗의 소망

<본문>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사무엘하 23:1-7)

<설교>

지난 시간에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다윗의 이러한 노래는 항상 현실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상기하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주일 전 설교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참된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자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즉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악한 세력이 다스리는 세상의 멸망을 선포하는 권세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스림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백성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이 종에서 벗어난 출애굽이라는 기적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다윗이 메시아의 세계를 소망하며 노래하는 내용인데 다윗의 이 노래는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나라가 우리의 전부라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 말은 대개 유언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것도 다윗의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말로 무엇을 남길까요? 사람마다 다들 다르겠지만 어쨌든 남은 자손들을 위해서, 그리고 재산정리를 위해서 뭔가 남기는 말이 대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마지막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지막 말을 살피면서 신자가 과연 세상을 떠나면서도 놓지 말아야 하고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 자신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질 세상을 소망하는 것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내 집이라는 것은, 다윗의 가문을 의미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단지 혈통적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다윗 가문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가문이 되어짐을 뜻합니다. 혈통으로 지탱되는 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지탱이 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함으로써 한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언약임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언약의 성취로서 오신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가 함께한 다윗 가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 자신 역시 비록 죽음을 앞에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다는 것을 소망하며 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죽음을 앞에 둔 자가 하는 유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본문은 죽음을 앞에 둔 다윗이 남기는 유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집을 소망하는 말을 남긴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히 11:13-16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결국 믿음이 믿음의 조상들로 하여금 하늘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자가 되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증거되게 하며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설사 언약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언약 안에서 영원할 것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세상이 바라볼 때 정상적인 것입니까? 한마디로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정신 나간 사람들의 광신으로 보여지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세상에 비해, 죽어도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이루어질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존해 있을 때 소망하고 기다렸던 것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말을 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인 성령이 자신에게 임하심으로써 증거하는 성령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사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 영원한 세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세계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그 세계를 뜻합니다.

다윗은 이 언약의 세계를 소망했던 것이고,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언약의 성취로 오실 그리스도의 세계를 소망했고, 오늘 우리는 언약이 성취되어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윗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이 어떤 분을 소망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다윗이 소망했던 메시아는 이런 분입니다.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소망했던 것이고, 그분이 다스리는 세계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 분은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햇빛으로 땅에서 싹이 나는 새 풀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분이 오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비취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다윗이 오시기를 그토록 소망했던 그 분을 동일한 마음으로 소망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를 다윗의 소망을 생각하며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이라는 약속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 보이는 세상은 참된 현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질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세계가 따로 존재하며 그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에게 보이는 세상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허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왜 우리가 축하해야 할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누가 누구를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실 예수님에게는 축하받을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낮아짐과 비참함과 죽음이 전부인 세상의 삶인데 그게 무슨 축하받을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둠과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으니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사망에서 해방되는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기쁨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기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기쁘고 반가움이 된다면,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하루하루의 삶은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세계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세계야 말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중심이 되어 있는 신자는 비록 살면서 세상의 것들로 인해 흔들림은 있으나 말씀에 의해 중심을 되찾으며 살아갑니다.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길을 점검하면서 진리의 길, 의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은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하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도 그리스도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나 말, 생각 등을 말씀으로 살피면서 잘못됨을 발견하며 그리스도만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