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강) 사무엘하 22:44-51 다윗과 그리스도

<본문>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사무엘하 22:44-51)

<설교>

어느 사람이든 자기 미래에 대해 궁금증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느덧 2005년 한 해도 두 주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해마다 새로운 해가 가까워지면 토정비결을 보는 곳이 바빠지는 것도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왜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미래에서라도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누가 인생의 앞날에 대해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앞날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인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알 수 없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자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를 두고 기도하는 것 역시 불확실한 미래가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것이라면, 미래 즉 인생의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앞날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에 분명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참된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내 인생이 멸망으로 끝나느냐 영생으로 계속되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일의 경제 문제나, 주식 동향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내일은 사는 것이 좀 더 나아질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앞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미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재가 과거가 없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즉 하나님께서 지난 인생을 이끌어 주셨기에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기에 때문에 현재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 감사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두고 기도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래만을 생각하며 미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주기를 고집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울고, 기뻐하는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가 중심된 미래를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미래를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노래에서 바로 그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44-45절에서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현재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구원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다윗이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백성들이 자신을 반역한 일, 즉 압살롬이 반역한 때나 세바가 반역을 했을 때 백성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에 대한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말을 보면 다윗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는 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란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하나님이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신 다윗에게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다윗을 섬긴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윗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며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다보는 세상은 언약의 성취가 함께 한 세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메시야가 세상에 오심으로 주어질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 순종치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유익을 앞세워 배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누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다윗의 노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성취되어질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 55:4-5절을 보면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과 다윗의 노래가 같은 맥락의 내용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사야나 다윗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성취될 메시야 구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풍성’이란 소문을 뜻하는 말인데,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순복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구원의 노래는 다윗 개인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기에 47절에서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찌로다”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성취될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원이기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바위’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노래를 대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과 아주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에 생존할 동안에 주어질 나의 미래일 뿐인데, 다윗은 세상 안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되어질 일을 내다보며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내다보고 있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되어 질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 진 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섬기겠다면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지만, 오늘날 신자는 메시아로 성취된 구원을 기뻐하며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을 내다보며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51절)는 노래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큰 구원과 인자하심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큰 구원에 참여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참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인생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볼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결국은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미래가 아무리 잘되고 풍족하면 뭐합니까?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돼봐야 결국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내다보며 살아가십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도 바라보는 현실이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라질 현실과 함께 어둠에 영원히 묻힐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잘된다는 것,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이 잘된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세계이지 교회가 잘되고 내 인생이 잘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울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