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 사무엘하 22:29-35 주는 나의 등불

<본문>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사무엘하 22:29-35)

<설교>

여러분은 이 세상이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세상의 일들이 여러분께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어쨌든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세상이 마음에 쏙 든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이유겠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뻐하셨던 그때의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던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해 창조된 모습 그대로였기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욕망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들지 않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조치는 무엇이겠습니까? 깨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하시겠다는 세상 속에서 잘 살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의 때가 되어 세상이 끝장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심판 앞에서는 교회 부흥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라는 것도 의미가 없고 세상이 우러러 보는 성공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에 목메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국 심판 자체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라는 환경에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신자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고 말합니다. 등불은 어둠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주는 나의 등불’이라고 노래하는 것은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흑암에 있는 자신의 실상을 알기에 흑암에서 건져 주실 여호와를 등불로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흑암에 있음을 보지 못한 자가 여호와를 ‘나의 등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치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빛’ ‘나의 등불’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다윗처럼 흑암에 있는 자기 실상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라면 다만 그럴듯한 말치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끝은 심판입니다. 심판은 영원한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현실은 흑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흑암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실제 어둠에 갇혀 있다고 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구하겠습니까? 어둠을 밝혀줄 빛을 찾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태가 흑암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라면 흑암에서 건져줄 분을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나의 빛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흑암, 어두움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일컫는 것도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자신을 건져주는 분으로써 ‘빛’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는 큰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그 속에 담아 두고 사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심판과 상관없이 바른 신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상관없는 예수는 이미 예수가 아닙니다. 심판이 없는 하나님 역시 다른 신에 불과할 뿐입니다. 설사 세상의 끝이 심판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심판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역시 그 신앙은 말씀의 도를 따라 흘러가는 신앙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은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데, 정작 신자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있는 자신을 보지 않은 채 예수를 말한다면 그 예수는 결국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십자가를 근거한 새 생명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흑암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흑암에서 건져줄 예수님을 ‘나의 등불’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심판에서 건짐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서 건짐 받고 좀 더 편안하고 잘사는 인생을 꿈꾸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왜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왜 정미하다고 말합니까? 조직신학에서는 성경의 무오설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번역이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성경은 무오한 것입니까? 무오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다는 말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정미하다는, 즉 정교하고 세밀하다는 말을 우리가 보는 성경의 내용이 오류가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번역이 잘못된 성경도 무오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성경의 글자가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도 결국 정경으로 인정한 사본을 여러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기에 번역상 잘못된 부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완전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무오성은 글자에 오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오류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갑니다. 흑암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고 빛으로 오신 분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도는 그래서 한치의 오류도 없이 완전합니다. 자기 백성을 흑암에서 구원 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세밀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는 귀찮기만 할 뿐입니다. 무엇을 두고 하나님의 도를 완전하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고 있기에, 그리고 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를 바라보고만 있기에 하나님의 도는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와는 상관없는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누가 여호와를 피난처로 바라보겠습니까? 세상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무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말하는 피난처는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피할 곳으로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심판 아래 존재하는 실상을 안다면 여호와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분으로서의 피난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란 심판을 기다리는 마지막 때의 남은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이 시대에 보냄 받은 선지자로서 세상에 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32-35절)라는 노래를 당당히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만이 왜 나의 요새시고 바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심판에서 나의 방패가 될 존재는 세상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자리에 서 보십시오. 우리의 실체는 흑암아래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보시고, 과연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십시오. 땅의 것을 과연 힘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세상에서 잘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또한 그것을 복으로 일컬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심판을 생각하고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마지막 때에 남은 자에게는 승리의 날이고 무엇이 옳은 것이었는가가 확실히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노래하는 그분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주를 나의 등불이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면 다윗의 등불이었던 분이 곧 오늘 우리의 등불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의 인도하심 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지 절대 세상에서 편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우리의 소원에 의해 행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인도하심으로 인해 꺾여지고 무너지고 낮아지면서 마지막 때 생명의 나라의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며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