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강) 사무엘하 22:21-28 상 주시는 하나님

<본문>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사무엘하 22:21-28)

<설교>

2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라고 노래하면서 여호와를 자신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자신의 깨끗함에 대해 갚아 주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고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의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상을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다윗도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라며 수긍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22-25절에서도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의와 깨끗함을 말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분명 다윗의 의와 깨끗함을 보시고 상을 주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자신의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고 말하고, 죄를 피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의로운 자로 깨끗한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행위를 놓고 볼 때 다윗이 과연 자신을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윗이 자신을 의롭다, 깨끗하다, 죄를 피하였다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범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자입니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자신을 두고 의롭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죄를 피하였다느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얼굴이 두꺼운 뻔뻔한 사람이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범죄 하기 전에 이러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기 전에는 의롭고 깨끗하고 죄를 피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범죄는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악의 요소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상황에 의해 죄가 외부로부터 투입되어 범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범죄의 행위가 없을 때는 의롭다가 죄가 들어오면 비로소 범죄하게 된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다윗에게 있던 악의 요소, 즉 죄의 본질이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기 전에는 죄인이 아니었다가 범죄한 후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 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는 저 사람처럼 범죄를 행하지 않았으니까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행위는 없을지 몰라도 죄는 그 속에 담아두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범죄의 행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죄인인 것이고, 또한 다윗의 노래는 다윗이 범죄하기 전에 부른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즉 다윗은 분명히 범죄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를 말하고 깨끗함을 말하고 스스로 지켜 죄를 피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의 악을 돌아볼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윗의 이러한 노래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깨끗함,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악에 대해 다윗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나의 피란처’등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행한 다윗의 표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간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들어서 머리에 담아둔 지식이 아니라 실제 대적과 원수가 다윗을 괴롭히고 또한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그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출입하면서 들었던 지식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구축된 신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는 다윗의 노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상 주신다고 할 때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잘한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자기 의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에 대한 일반인의 개념은 잘한 일에 대한 칭찬과 보상이고 못한 자와의 구별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은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이고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상을 언급할 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잘한 일이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잘한 일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잘한 일이 있습니까? 다윗이 의를 말하지만 과연 의를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다윗이 의를 말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의를 자신의 행위에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해한 의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그 의는 무엇일까요?

다윗이 범죄 했을 때, 그가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시 51:1절의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범죄한 자로서 모든 희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과 자비에 있음을 내다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긍휼과 자비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었다면 죄 있는 모든 자는 멸망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다스리는 세상이기에 의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심판에 대해서도 사랑을 기준으로 하여 새롭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롬 3:28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처럼 그 누구도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 지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의는, 자신의 범죄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줄 사랑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윗은 ‘내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깨끗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만약 자신의 행위를 바라본다면 감히 자신을 깨끗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너보다 더 깨끗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살인강도 앞에서도 ‘나와 너는 똑같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시 51:7절의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는 말을 보면 다윗은 다윗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긍휼과 자비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말하는 깨끗함은 우리의 모든 악을 용서하시고 더러움을 모두 씻어주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 안에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행위가 아니란 것입니다.

22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내용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준으로 하여 이해를 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여호와의 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여호와의 도를 지키며 도를 따라 사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결국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와 행위를 나열하고 그것을 의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또한 예수님의 정결하심과 의로우심 안에서 깨끗하다,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상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깨끗함을 얻고 의롭다 여김 받음으로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어떤 상을 받기를 원합니까? 25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갚으신 것이 있는데 무엇으로 갚으셨을까요?

26-27절을 보겠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자비한 자에게 다른 상으로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심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으로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자비하심과 완전함과 깨끗함의 나라인 주의 나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대신 사특한 자에게는 거스리심을 보이시겠다고 함을 잊으면 안됩니다. 즉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외면한 자에게는 긍휼과 사랑과 자비가 없는 하나님으로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심판을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약 2:13절의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주께서 우리를 자비하심으로 대하시고 주의 완전함과 깨끗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악함에서 멸망의 존재에 불과한 자신의 실상을 본다면 이 상의 의미를 능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래서 인간은 자신의 그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구원 받았음을 아는 신자가 사랑을 멸시하는 것에 불과한 자기 의를 내놓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게 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고 사랑임을 알고 있는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관계 안에서는 못난 자와 잘난 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남을 부각하고,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누가 더 낫다’라는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불쌍하고 초라하고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나를 알고 나니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자비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것이고 깨끗한 것이고 도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