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강) 사무엘하 22:1-8 다윗의 노래

<본문>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사무엘하 22:1-8)

<설교>

22장은 1절의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 표현들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반석’이라고 외치고 나를 고통과 위험에서 건져 주기를 기대하면서 ‘나를 건지시는 자’라고 외칩니다. 다른 표현들도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며 외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고,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에 보면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하고, 1절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그 날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노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다윗과 같은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깊이 자각할 때 다윗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의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내용을 보면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찬송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다윗이 자신의 남은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계속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경험한 구원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험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천국’을 연상하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것 역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치 지금은 아직 구원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윗이 경험한 구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때는 죽은 후에 천국을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윗의 대적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대적,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을 경험한다면 다윗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아마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나를 죽이고자 하는 대적도 사울과 같은 존재도 없다고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께 대적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또한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울과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 아리송하다면 여러분은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오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대적이란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는데, 항상 내 편에 서서 날 위한 삶에 몰두 했기에 대적이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무늬만 신자인 삶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대적, 사울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대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다윗의 대적들을 보면 반역을 한 압살롬이나, 세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백성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칭송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사울 자신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는 것에서 사울은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이고 다윗을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보존하고 다윗에 의해 상대적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러한 모습에서 누구를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사울의 입장이 되면 사울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이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사울의 시기 역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도 사울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압살롬 역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바나 시므이 이들 모두 역시 내 속에 있는 나의 실체가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적이란 외부에서 나를 괴롭히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기보다는 내 속에 존재하며 나를 붙들어 사울의 길로, 압살롬의 길로, 다윗을 대적했던 자들의 길을 가게 하는 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붙들고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나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구원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대적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라면 이러한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만드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신자는 모두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기에 대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앙 아닌 신앙에 머물러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살인,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로 인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악함을 아시기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창 8:21).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은 정결함 제물의 희생의 피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으로 세우신 희생 제물의 피도 멸시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판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야 말로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세상이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사울과 압살롬처럼 다윗의 대적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 권력을 추구하고 날 위해 살아가는 나의 본질을 내가 상대하여 제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대적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5-7)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이 노래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벌어서 자식 키우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현실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참새까지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른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은 보고 사십니까? 아니면 돈이 필요한 현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현실만 보이십니까?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대적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 힘과 내 열심과 나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내 의지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력의 강함과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날마다 구원이 필요한 자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알고, 나의 악함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에게 오늘도 구원해주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경이기에 바리새인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적의 실체에 대해 무지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반석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특한 나를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대적의 실체를 발견하시고, 그 대적을 대적할 수 없는 여러분의 연약함을 깊이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신자가 부르는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