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사무엘하 21:15-22 이스라엘의 등불

<본문>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손과 매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사무엘하 21:15-22)

<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려면 옛날에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면 그분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게 되면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를 걸게 되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성을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블레셋의 공격으로 인해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전투를 하지만 그때 다윗은 이미 나이들어 노쇠한지라 쉽게 피곤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이 피곤한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이 다윗이 죽이려고 하자 아비새가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다윗을 구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노쇠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힘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안 다윗의 종자들은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17절)라고 말하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까지 일컬으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가 위험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만류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들이 다윗을 만류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다윗 왕 당신이 아니면 안됩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있어야 우리 이스라엘이 존속될 수 있으니까 전쟁에 나가지 말고 옥체를 보존하소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존속되어 온 힘의 근거를 다윗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이만큼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죽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존속 자체에 큰 위기가 된다고 여기고 다윗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두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이라는 답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답을 여러분 자신에게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다윗을 등불이라고 일컫는 이스라엘이야 말로 오늘 우리들의 믿음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오셨고 지키셨기 때문에 강대국들과의 수많은 전투에서도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 즉 다윗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죽고 살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 이스라엘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것을 다윗의 위대함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보존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늙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기 때문에 다윗이 살아있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도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즉 다윗이 잘한게 있어서 하나님이 다윗을 봐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과의 언약이었습니다.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다윗을 도우신 것이었고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이었지 다윗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다윗을 바라봅니다. 마치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면서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시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 분이 있어야 된다’는 식의 생각이야 말로 다윗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속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교회가 유지되고 존속되는 것도 어느 특정한 사람의 힘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는 불신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 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면 세상에 속해 있는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근거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살게 하셨고 하나님이 은석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유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으로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 오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를 살려 놓으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려 놓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지금의 환경과 형편에 있게 하신 것이지 어느 인간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게 하시는 분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생존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지하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자신의 생존이 흔들릴 것이라고 여겨 염려와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말만 할뿐 살아계신 분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앙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의 불신앙을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내세워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

요즘 순복음 교회가 조용기 목사 은퇴를 반대하는 서명을 한다고 야단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없으면 기독교의 사역에 큰 지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은퇴하면 순복음 교회 자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조용기라는 한 인간을 순복음 교회를 이끌어 온 힘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22절을 보면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일이 다윗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 22절의 구절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처럼 장대한 사람들을 다윗이 아닌 다른 신하들이 모두 죽였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면 십브개란 사람이 장대한 자의 아들 중 삽을 죽였고, 19절에서는 엘하난이란 사람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도 역시 골리앗처럼 장대하여 창자루가 베틀채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열 두 손가락과 열 두 발가락을 가진 장대한 자의 소생을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골리앗과 같은 장대한 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고 장대한 자들을 상대할 만한 용사라고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즉 어린 소년의 몸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과 다를 바 없는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힘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의 승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다윗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전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 존재해 온 것이지 다윗이나 어떤 특정한 인간 덕분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신다면, 지금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돈이 여러분을 살게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도움 때문도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생존에 필요한 것은 돈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타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돈이 내 수중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도우시기 위해 누군가를 나에게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는 온통 사람이 한 일만 언급합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업적을 칭송할 뿐, 그 사람을 세워서 세상을 다스리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이 볼 수 없는 분을 보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세상이 믿지 않는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기에 보이는 것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되고 염려에 빠지게 되지만, 신자가 의지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의 것도 사람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염려에 빠질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린 지금껏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도 실상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의지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편안히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자만, 설사 힘들게 된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등불은 다윗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로 오실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언약이 그들을 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등불은 돈도 사람도 아니라 우리를 멸망에서 건지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모이는 것입니다. 주만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힘이고 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