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강) 사무엘하 21:1-9 사울적인 요소

<본문>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사무엘하 21:1-9)

<설교>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남겨두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고 반대로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 버리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한 관심거리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너는 말해라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가겠다’는 식으로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무관심한 채 그냥 내 식대로 살아가는데 열심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파 묻혀 있는 사울적인 요소들을 파헤쳐 드러내며 고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고자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사울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결코 사울적인 요소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깨닫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사울적인 요소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어느 시기에 기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삼년 기근을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뭔가 하면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않은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 다윗이 어떤 해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을 내리심으로서 이스라엘이 사울이 기브온을 죽인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고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서 드러난 사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를 말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사울적인 요소란 또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한 대로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고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즉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죽인 것은 이방인들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9:1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 당시에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할 때 이미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먼 지방에서 온 것으로 위장을 하여 여호수아와 화친의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여호와로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명하고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로 삼았던 것입니다(수 9:27).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언약을 맺은 것으로 인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치고자 하였으나 족장들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오히려 진노가 임할까 하노라 하면서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기브온 사람들을 살린 것은 여호와로 인한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이 그들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사울의 열심이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절에서 사울을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으로 말한 것을 보면, 어쩌면 평소에 이스라엘이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사울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였습니다. 그 이유는 기브온 사람들이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17:18-19절의 “그가 이미 손을 내어 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고 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청산해야 할 사울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의 속성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시는 대로 약속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공로도 힘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이 속성에서 어긋나는 자는 토해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호 받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피를 흘리면 안 됩니다. 민수기 35:33절의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누구든 피를 흘리면 그는 피로써 갚아야 하는 것이 가나안 땅의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절)라고 묻자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요구하게 되고 다윗이 일곱을 내어주자 그들을 목매어 죽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구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기에 피 흘린 자의 피가 아니면 그 죄를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법칙을 알았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준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피는 피로써 갚게 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울이 피를 흘린 자라면 우리 역시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법칙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결국 우리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달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가 적용되는 땅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사울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 받고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땅에서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사울적인 요소를 가지고 예수를 찾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존재들이라면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브온이 언약으로 인해 가나안에 머물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언약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죄가 심판으로 끌어 갈 수 없습니다. 언약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용서하심의 언약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이 언약 안에 있는 관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지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가 사로 다투고 피를 흘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은 왕이기 때문에 왕의 권력으로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왕이라는 것이 결코 권력이 아니며, 설사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래 있음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라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타인을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두를 용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하고 계시고 용납하고 계시는 지체를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로는 지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착각으로 사울적인 요소를 수시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러한 사울적인 요소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총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성도라는 관계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