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강) 사무엘하 20:14-26 여인의 지혜

<본문>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요압이 대답하여 가로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저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사무엘하 20:14-26)

<설교>

압살롬의 반역이나 세바의 반란, 그리고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권력을 스스로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나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도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마사를 죽인 요압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요압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윗의 정책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왕으로서 정책을 펼쳤지만, 요압은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자신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군장으로 세운 아마사를 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요압은 자기 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세바가 도망한 아벨 성으로 가서 세바를 잡기 위해 그 성을 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나와서 요압에게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18,19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아벨 성을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업이기에 누구도 손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반란자인 세바를 잡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압의 목적은 아벨 성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세바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바를 잡기 위해 아벨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결국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는 요압이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았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고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20,21절)는 말을 하고, 여인은 성읍 사람들에게 요압의 말을 전하고 결국 세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던짐으로서 요압이 물러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대조되는 것은 연약한 여인의 지혜와 요압의 어리석음입니다. 요압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여호와가 보실 때 어떠한가에 대해 도외시 한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요압과 같은 어리석음에 치우쳐 살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압에게는 아벨 성이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보다는 세바를 잡아 죽임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군장이라는 위치를 다시 확보하는 것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윗에게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세바를 잡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자신의 행위가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입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는 것이 우습게 여겨진다면,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수시로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짓밟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의 원칙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천국의 이 원칙에 순응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어떤 행위가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처럼,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신의 위치와 위상을 되찾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가 용서와 긍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마음에 합류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굳게 세우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위에 우리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위상 위치 등 모든 것은 지체라는 관계 속에서 무너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의 관계를 소중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체라는 관계는 덮어 버리고 나의 자존심과 위상을 앞세우며 타인을 공격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세바를 잡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고자 하는 것처럼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공격하고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혜로운 연약한 여인 하나를 세워서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라는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여인이 이 말을 했다면 요압처럼 부인할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치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도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를 비난 한 것일 뿐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요압의 의도도 아벨 성이 아니라 세바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도가 결국 아벨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의도가 어떠했는가는 상관없이 우리의 말이나 행동들이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몸의 관계를 치는 것이 되어 질 수 있음을 깊이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의의 사람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놀라운 기쁨으로 내 속에 자리한다면, 분명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가 굳게 세워지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가 바로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나의 위상이나 자존심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고집하고 나를 세우려고 하는 길의 마지막은 멸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은 무너진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못함으로써 결국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는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러한 실상을 보지 못하고, ‘나는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라는 자기 착각과 환상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을 보십시오. 천국의 원칙인 용서와 긍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옛 본성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현실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는 나의 현실, 나의 실상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대적이었음을 보게 될 때 자신에게 한없이 절망하면서 그러한 나를 악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의 피의 귀함을 마음에 두게 될 것이고, 자연히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역시 내가 허물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용서와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지혜란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로 나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혜롭게 처리한다는 것은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것이 되는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지혜가 여러분께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전도서 9:13-15절을 보면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인의 지혜가 성을 건졌는데 그 여인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지혜를 멸시하고 대신 힘을 높이는 것이 세상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높여 할 것은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자 힘쓰는 지혜 있는 신자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전도서 9:16-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지혜가 힘보다 낫습니다.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낫다는 이 말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나이 들고 힘있는 자가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지혜 있는 자가 어른입니다. 왜냐하면 힘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곧 지혜자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