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사무엘하 20:3-13 요압의 살인

<본문>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 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아마사를 큰 길에서 옮겨 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사무엘하 20:3-13)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세바의 반란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바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좋아서 다윗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마당에 다윗에게 등을 돌리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다윗을 환영하는 척할 뿐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다 사람과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지를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른 채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도권을 얻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1절)는 말로 선동하는 세바의 말에 쉽게 동조하여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이 반역자인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불쌍히 여김으로 다윗 언약에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불쌍히 여김을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 마음대로 다윗을 선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자신들은 숫자가 많음으로 자신들이 떠나면 다윗이 아쉽지 자기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힘과 세력만을 믿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란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음을 뜻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도권을 뺏겨도 괜찮은 것이고, 욕을 먹어도 괜찮은 것이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욕을 먹고, 무시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식으로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보다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바의 반란과 같은 것입니다.

세바의 반란과 함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은 압살롬에 의해 더렵혀진 열 명의 후궁을 별실에 가둬 버리고 동침하지 않음으로서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입니다.

사실 열 명의 후궁이 압살롬과 동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궁에 남겼기 때문이고, 압살롬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후궁들의 죄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다윗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후궁들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구실을 정당화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해서도 어떤 구실을 동원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후궁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며 자신의 수치를 끝까지 상기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죄의 자리에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으면서도 그 죄가 우리의 삶에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끄러운 자리에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그 어떤 공로도 끄집어 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만을 바라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된 다윗의 후궁들은 다윗에게 그의 죄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를 증거 해주는 증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안다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 역시 다윗의 마음으로 교통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또 다시 다윗의 마음은 외면하고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아마사를 불러 삼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라고 합니다. 세바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약속한 기일이 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5절). 결국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고 명합니다.

아비새가 출동을 하자 요압도 함께 따라 나서게 되고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갔던 아마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압이 ‘형은 평안하뇨’라고 인사하는 척 하면서 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7-10절). 그리고 시체를 들판에 버려둔 채 그 위에 옷을 덮어 놓은 요압은 군사를 이끌고 세바를 좇으러 간 것입니다(11-13절).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유는 아마 다윗이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벌하기보다 오히려 군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다윗의 군장이 요압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요압은 아마사에게 밀려난 것이었던 것만큼 다윗에게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장으로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은 다윗과 함께 하여 다윗을 위해 싸웠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거센 반발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요압의 경력만을 살펴본다면 요압은 분명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요압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은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관점에서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볼 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 멋대로 행동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압이 아브넬과 압살롬과 아마사를 죽였지만, 그 모두는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 중 누구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살려주라는 당부까지 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말을 모두 묵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해 버린 요압이 다윗의 마음에 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해 저마다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죄가 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네가 그러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말로서 자기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라도 지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에 그러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요압의 살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보다 자기 존재성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의 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기 존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으신 현장인 십자가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누구도 정당한 인간이 되지를 못하며 누구도 세상에 존재할 가치는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섰을 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없는 자들이 모여 서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역시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이 열 명의 후궁을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그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죄에 대한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과부로 지내야만 하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서로에게 나의 죄를 보게 하는 증인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하기 위해 형제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네가 잘못했다’는 것으로 따지고 있다면, 그것은 요압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를 곧게 세우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요압은 비록 자신이 ‘나는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는 분명 다윗에게 충성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증인들이 바로 요압에게 죽은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였습니다. 요압은 비록 그 몸은 다윗과 함께 했지만 그 마음은 다윗에게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본문처럼 살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사람이며, 예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요압과 같은 착각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헌금하는 것 등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신자의 관계에서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열심히 고백하는 내가 과연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된 자로 형제를 만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볼 때는 반역도 하지 않고 다윗과 함께 한 정당한 자였기 때문에 죽어야 할 자를 살려준 다윗의 은혜의 맛을 알지 못합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요압에게서는 은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옳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서로의 행동을 바라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악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나에게 부어진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서로를 대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 마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