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사무엘하 20:1-2 세바의 반란

<본문>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사무엘하 20:1-2)

<설교>

시편 59:1-2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문자적인 이해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원수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마음 깊이 이해되는 내용이겠지만 원수가 없다면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읽고 끝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런 부분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읽기는 읽으나 나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들이어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만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가는 것이 전부인 것들 말입니다.

물론 말씀의 의미를 해석을 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여 들려줘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수가 누구인가를 말해줘도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들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는데서 찾고 싶습니다. 나의 모 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도 없고, 아무리 예수가 좋다고 하더라도 예수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았기에 원수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결국 다윗처럼 고난 받는 입장에 있지 않기에 원수에 대한 이야기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주리고 고난 받는 약자의 길을 원하지 않기에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관심 밖이 되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원수와의 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관심도 없고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내 교회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가 굳게 세워지고 증거 되기 위해서라면 내 교회는 망해도 좋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것이라는 원수의 생각에 합류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기에 그 마음은 자연 자기 유익이 있는 곳을 향할 수밖에 없고 자기 유익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유익이 되는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다윗의 귀환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자기 유익을 따라 마음이 흘러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다윗이 없습니다. 유익이 안된다 싶으면 다윗에게서 멀어지고, 다윗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리하다 싶으면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득을 보려는 노림수만 있을 뿐, 자신들이 다윗에게서 멀어졌을 때의 결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어집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다윗을 대적하고 멀리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인가만 따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본문에 세바의 반란을 있게 한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은 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라고 말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일에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합니다. 유다는 다윗의 지친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내세워서 서로 다윗에게 가까운 위치에 있으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19:43절에서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다 사람들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다툼을 보면서 양쪽 모두의 관심은 다윗 안에서 얻어지는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얻어지는 자신들의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쪽도 자기 유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세바의 반란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세바라는 사람이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 세바의 말은 유다 지파가 다윗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면 자신들은 결국 다윗으로부터 멀어져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얻을 유익도 없을 것이니 다윗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바의 선동에 마음이 움직인 이스라엘은 결국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2절)는 내용처럼 다윗을 좇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바를 좇게 된 것입니다. 다윗보다는 자신들 앞에 서서 외치는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물론 다윗보다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세바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오히려 강한 나라를 건설하여 크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좇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할 뿐, 다윗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좇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윗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다윗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께 돌아올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를 좇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불의와 더러움의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십니까? 이 거룩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영원한 멸망이며 사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이득을 꾀하기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머물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가나안 여인 하나가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는데 이 여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는 것입니다. 즉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며 예수님을 찾아와 사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이 이방인이기에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거듭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고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민망한 말을 듣게 됩니다.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한 말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될 수 없는 자기 처지를 바라보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힘을 빌려 득을 보겠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자신을 물리치지 않기만을 원합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알기에 개로 취급을 받아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의 위치에라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어떤 위치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불쌍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에, 예수 밖에서는 높은 자리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도 불쌍한 존재에 불과할 뿐임을 알기에 예수 안이라는 관계를 소원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누릴 자신들의 위치와 이득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환영하고 좇는 이유가 오직 자기 유익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겼는데 세바가 선동을 하자 가차 없이 다윗을 좇는 것을 중지하고 세바를 향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유리한 것만 선이고 진리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라는 다툼을 했었지만 그들 역시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기 위치만 생각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떤 높은 위치에 있어도 불쌍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위치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2:1·2-13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결국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운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원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개보다 못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의 위치에 있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먹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산다면 원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의 말씀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으로 인한 신자의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불쌍한 처지에서 구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 역시 자기 유익을 위한 계산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이 나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예수께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구원 받은 자라면 인생이 자신에게 불리한 길로 흘러가고 남들보다 못한 위치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운 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감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