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 사무엘하 19:40-43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툼

<본문>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사무엘하 19:40-43)

<설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선악과를 세우셔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인간은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먹으면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장치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장치가 인간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장치는 만들어 놓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선악과를 안먹으면 영생을 준다가 아니라, 무조건 영생을 얻게 해주겠다는 것이 진심으로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드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입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메 날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창조되어진 세상의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것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은 말씀의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시고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들어 놓으심으로 말씀의 세계를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말씀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에 그것으로 하나님의 기쁨은 계속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고, 결국 영생에서 멀어진 채 이제는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처지가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은 인간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 등으로 인간의 존귀성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 아래 있는 인간만이 오직 인간다운 인간으로 평가되어질 뿐입니다. 세상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것을 치장하여 자신의 존귀성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말씀에 순종한자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씀은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자신을 위한 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말씀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오직 말씀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위해 사심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씀의 세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원칙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의 세계에 내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세계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생에 참여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죽음에 붙들려 있던 존재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한 처지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망각하기에 교회에서 끊임없이 세력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게 되었을 때 왕을 호위하여 함께 건넌 사람들은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지도자 위치에 있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다 백성은 전부가 다윗과 함께한 반면 이스라엘은 절반만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귀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환하는 모든 행사를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주관함으로 인해서 단지 다윗 주변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다윗과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으로 인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41절의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위에 대한 부당함을 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유다 사람들은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42절)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을 모신 것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지친인 까닭이며 다윗으로부터 그 어떤 특혜를 받은 일도 없기에 이스라엘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을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립과 다툼은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는 말을 보면,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채 다윗 왕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라는 말은, 다윗 왕과의 혈통적 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숫적인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다윗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위치에 있기에 다윗에 대해서는 유다보다 더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내세우면서 누가 다윗과 더 가까운가를 따지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보지 않은 채 서로 다윗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압살롬이 좋다하며 다윗에게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다윗은 피신을 하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가 더 다윗과 가까운가로 다툰다는 것이야 말로 똥 묻은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난다며 다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든 이스라엘이든 다윗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입니다. 다윗 편에서 볼 때는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치 전혀 다윗을 반역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인 것처럼 다윗에 대한 서로의 위치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배신한 자들일 뿐입니다.

눅 9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따지는 것은 ‘누가 더 공이 많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많은 자가 천국에서도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공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내어 놓을 공로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어린아이는 자신의 공로가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라는 것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런 사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택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누가 크냐’라는 다툼은 아예 있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누가 크냐’라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주도권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움으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쟁적으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도 경쟁적으로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경쟁적으로 하며, 심지어 목사를 섬기는 것에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천국과 상관없는 지옥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경쟁과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도 해당이 전혀 안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공로로 되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로 신자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은석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입니까? 그렇게 여겨진다면 서로의 주도권을 위해 싸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 즉 말씀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공짜로 생명나무에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존재로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다같이 죽고 썩어질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로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모여서 누구의 공로를 내 놓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지금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한 채 나에게 유리한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피가 가려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 자가 된다’는 말은 지옥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뺏긴다면 그 마지막은 결국 지옥의 사람으로 끝나게 될 뿐입니다. 자기 공로가 없는 그가 작은 자로 여김 받으며 그가 곧 천국의 사람임을 명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랑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