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 사무엘하 19:31-39 다윗과 바르실래

<본문>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 세라 저는 거부인 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내가 너의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사무엘하 19:31-39)

<설교>

성경은 인간에게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질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은 공허한 것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흩어져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흐트러진 마음은 흐트러진 채 존재하고 말씀은 하늘의 구름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허함을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들려질 때 정상적인 반응은 말씀에 의해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갈 곳을 발견함으로써 한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곳으로 집중된 마음은 강한 힘으로 존재하게 되고 오직 하나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현재의 실상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거짓을 안고 살아갑니다. 거짓된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기에 자기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상을 감추는 거짓된 것에는 종교 생활이라는 것이 자리합니다. 종교 생활을 동원하여 자신을 포장함으로써 악한 것을 감추고 대신 거짓으로 위장하여 나 아닌 다른 나를 보여주고자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관심 밖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예수’ 떠들고 ‘십자가’를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짓된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장되고 단단히 포장된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 내는 것이 말씀의 기능입니다. 하나하나 벗겨지며 속살이 드러나게 해서 수치스러운 자신을 보게 함으로서 자신의 수치를 가려줄 분을 찾게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대한다면 결국 말씀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진다면 과연 자신을 ‘신자’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신자로 인정할 수 없게 합니까? 반대로 신자로 인정한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신자로 인정하도록 합니까? 골치 아픈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여러분은 신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자’운운하는 종교인으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함으로써 거짓된 것으로 신자인척하며 위장을 하고 살아왔던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은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만나고, 자신을 속였던 시바를 만나고, 자신이 은혜를 베풀었던 므비보셋을 만납니다. 시므이와 시바는 자신들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척 합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재앙을 막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척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거짓된 신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에 대해 솔직했다면 다윗을 저주하고 속인 일을 고백하며 ‘왕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환영함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얻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으로 위장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위장된 거짓일 수도 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고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떠들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 모든 것들이 위장된 거짓에 불과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못을 범한 분의 처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진정한 솔직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진심으로 안다면 하나님의 처분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회개했으니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용서 받기 위해서, 그리고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고백이기에 위장된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으니 신자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산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는 이것도 과분하다는 생각 아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에 대해 솔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온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밭을 시바와 반으로 나누라는 다윗의 결정에 대해서도 억울하다거나 불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부를 시바에게 주라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왔다는 것으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윗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알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채워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앎으로서 나오게 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바르실래라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31,32절을 보면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세라 저는 거부인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바르실래는 거부였으며 다윗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 다윗과 그의 일행을 보살피고 도와줬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절)는 말을 합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준 일에 대해 보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이 되어 돌아가는 상황에서 바르실래가 다윗과 함께 간다면 그의 남은 인생은 말 그대로 평안이 보장될 것입니다. 왕을 도와준 사람이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34-37절을 보면 바르실래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바르실래는 자신이 늙어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할 수 없으며 음식의 맛도 알 수 없고 노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음으로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한다면 오히려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과 함께 요단을 건넌 것은 단지 왕을 배웅하려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는가 하면서 사양합니다. 이러한 바르실래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사양의 미덕을 보이는 겸손입니까?

사람들이 신을 찾아 종교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정성에 대해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응해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신의 반응은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것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이러한 기대가 교회 안에도 난무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하면서 봉사하라고 하고 충성하라고 하고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까? 모두가 상급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상으로 복으로 갚으실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상을 기대하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 자신을 위한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위장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을 도왔으면서도 다윗이 함께 가자는 것을 거부합니다. 다윗을 따라가면 남은 인생이 편안해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다윗을 따라가면 오히려 다윗에게 누를 끼칠 뿐이라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베푼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하면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즉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 같은 자가 예수님과 함께 해봐야 예수님에게 누만 될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볼 때, 그리고 자신에 대해 솔직할 때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 받을 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을 하고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상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하든 그 대가로 상을 기대하지도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을 받을 자격도 없으며 상을 받을 일을 한 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심판에 처할 자를 예수님을 보내셔서 의인이라 일컬으시고 자녀 되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솔직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좇기보다는 나의 입장에 파묻힌 채 날 위해 살아왔고, 교회를 다닌 것 역시 내 만족을 꾀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나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오직 내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과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한 일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상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기도를 해도 날 위해 했을 뿐이고, 성경을 읽어도 날 위해 읽었고, 헌금을 해도 날 위해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상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한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인들에게 상급을 말하면서 열심히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날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 되게 하신 그 자리에서 무엇이 나를 백성 되게 했는가에 집중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범사에, 즉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실래를 보면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공로 운운하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으면서도 서로 자신의 잘한 것을 내어 놓고, 반대로 타인의 잘못함은 부풀리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거룩의 자리에 붙들어 놓으시는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