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3:1-5 강성과 쇠퇴

<본문>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설교>

본문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1절)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여 동안 다스리면서 여섯 아내를 통하여 여섯 아들을 보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다윗의 아들들을 소개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다윗이 강성하여 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강성하여 가는 동안 사울의 집에 남은 자는 왕으로 세움 받은 이스보셋과 4:4절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전부인 쇠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강성하게 된 것은 다윗이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워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에 다윗은 강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의 집은 하나님의 택한 존재가 아니기에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자신의 강성함으로 인해서 교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신앙인 것이며 겸손인 것입니다.

물론 현 시대에 있어서 외적인 강성과 쇠퇴를 두고서 선택과 비선택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잘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고 못사는 사람은 선택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시각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여부를 외적인 강성과 쇠퇴를 기준으로 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만큼은 잘사는 사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지체가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세상적인 것을 풍족히 누리는 것을 복으로 가르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나라로 등장합니다. 이 택한 나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증거는 결국 가시적인 것으로 선포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에 드러내고 성취하시기 위한 도구로 이스라엘을 택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기 위해 가시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가시적인 증거물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벽히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가시적인 것을 동원하셔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강성과 쇠퇴의 의미를 오늘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강성과 쇠퇴를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대에서도 강성과 쇠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쇠퇴함보다는 강성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강성이 쇠퇴를 이기는 것이고 강성이 쇠퇴를 다스리는 구조와 질서에 세상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스림 받는 것보다는 다스리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인간의 탐욕이 강성을 소원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강성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쇠퇴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강서이든 쇠퇴든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인생이 강성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쇠퇴한 자가 되었다고 해서 심판을 받는 것도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강성이든 쇠퇴든 사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인생이 강성해져야 할 당위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기 위해서는 강성해져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쇠퇴했을 때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강성해져야 한다는 구실을 붙이기도 합니다. 말은 그럴싸합니다. 쇠퇴한 모습에서 무시를 받는 것보다는 강성한 모습에서 세상의 부러움을 사게 되고 그들에게 ‘내가 이렇게 강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성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하나님을 찾아 나올까요? 신자된 우리는 바로 이점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강성이든 쇠퇴든 그것은 신자에게 맡겨진 역할일 뿐입니다.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탤런트들이 동원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역할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왕의 역할, 신하의 역할, 일반 백성의 역할, 또는 가장 밑바닥인 종의 역할 등, 이러한 모든 역할자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열심히 연기함으로써 한편의 드라마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좋은 역할, 즉 왕이나 장군과 같은 신분 높은 것만을 요구한다면 분명 드라마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불신자이면서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신 역할자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세상에 악한 자들, 불신자들을 그냥 놔두시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드라마에서 악인을 등장시키는 것은 착한 사람의 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증거되기 위해서는 분명 악인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불신자의 강성함에 대해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쇠퇴함에 대해서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지혜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즉 강성이든 쇠퇴든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일 뿐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성하게 된 자는 절대로 쇠퇴한 자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성과 쇠퇴를 함께 존재하게 하는 것은 강성케 된 자가 자신의 강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강성한 자가 자신의 강성함을 자랑하며 쇠퇴한 자를 무시하고 억압한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에게 있어서 강성함은 오히려 그를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 역할이 그 사람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하지를 못합니다. 마태 복음 11:11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는 크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례 요한은 큰 자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즉 세상의 사람들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처럼 크다 일컬음 받는 것은 그의 일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맡은 역할입니다. 그 역할로 크다 일컬음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요한도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보다 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천국의 백성들이 작은 자 큰 자로 구분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라는 표현을 하는 것은 진정으로 큰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13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구약의 마지막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즉 율법은 요한까지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은 십자가의 은혜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요한에 비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된 그가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과 우리를 두고 누가 큰가를 비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크다 일컬음 받는 자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것으로 강성하고 큰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강성하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은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택함 받지 못한 사울의 집이 결국 멸망을 하게 된 것처럼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강성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강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인생이든 세상이든 기존의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강성한 나라로 이미 이 세상에 임하여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5:10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강성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의 강성 역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그 근거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신자의 강성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외적의 강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강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강성함이 세상을 위협하지도 굴복시키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우리 스스로 외면해 버릴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세상의 것으로 강성하게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강성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잔뜩 안고 말입니다.

신자는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부터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말하고 믿음을 고백해도 세상의 것으로 힘을 삼고 외적인 강성함을 꾀한다면 그것은 신자의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길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되었습니다. 절대로 외적인 강함이나 세상의 것으로 강성해지는 길이 아님을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은 원하나 예수님이 사셨던 삶에 대해서는 밀쳐내는 식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분명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실패요 쇠퇴의 길입니다. 누구에게든 환영받지 못할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좁은 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두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성과 쇠퇴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의 조건과 형편을 힘으로 삼고 자랑하거나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형제들을 업신여기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강성과 쇠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천국이라는 그것 자체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나라입니다. 그처럼 강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신자는 강한 자로 큰 자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강성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강함으로 여러분을 증거하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마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자랑거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세상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에 세상의 것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의 강함이라는 것이 왜 별 것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로서 결코 쇠퇴할 수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이처럼 하나님만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날마다 강성한 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볼 때 여러분은 심령은 갈수록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