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 사무엘하 19:16-23 다윗과 시므이

<본문>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 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사무엘하 19:16-23)

<설교>

고린도후서 7: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근심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 있는가 하면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슨 것은 그들의 잘못됨을 책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은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했고 그들의 근심은 자신들의 잘못됨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구언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오직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만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해 책망하고 경고해도 그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 없기에 회개 역시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주 예수님을 향하지 않음을 말하기에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는 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복 받는 비결이나 기도 응답받는 비결, 또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사는 법 등을 가르침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없으면 안되는지 그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함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그 마음이 말씀 앞에서 열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악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악을 깊이 깨달으며 자신에게서 일어난 악을 바라보며 근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악을 책망하는 말씀이 있으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은 성경이 선포한 그대로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과 멸망의 이야기는 참으로 심각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심각한 내용이 정작 당사자인 우리에게는 전혀 심각한 내용으로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또는 지금의 얘기가 아니라 먼 훗날의 이야기, 또는 분명히 있을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없을 수도 있는 가정적인 이야기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지 저로서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책망이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리시는 경고며 책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고, 진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해 버린 결과가 어떠한가를 이스라엘을 세워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하나님을 머리에 담아 둔 채 성경의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그러한 착각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자기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회개하고 믿음 없는 영혼을 주께 맡기지 아니하면 멸망은 결국 나의 몫으로 주어질 것임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로서는 여러분의 마음이 이러한 근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할 뿐입니다.

본문에는 시므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시므이란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나를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나를 살리고 있는 그 힘을 믿는 자로 새롭게 되는 것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다윗에게서 마음이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고, 유다 사람들이 앞장서서 다윗을 돌아오게 합니다. 이처럼 다시 왕으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는 사람들 중에 시므이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시므이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하 16:7절을 보면 시므이는 망명길에 오른 다윗을 향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라고 외치며 다윗을 저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왕위를 빼앗기고 힘없는 자로 쫓겨 갈 때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가 다윗이 다시 왕으로 세움 받고 돌아오자 다윗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19,20절)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가 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며 엎드려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을 저주했던 죄를 뉘우치는 척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이런 모습은 참으로 괘씸하고 치사하고 약아빠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처럼 괘씸하고 치사하고 약아빠진 자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힘에 의해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한 자에 대해서는 저주가 나오면서도 강한 자에 대해서는 굽실거리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악한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을 저주한 것입니까? 다윗을 저주한 행위가 악이 아니라 다윗을 저주하게 한 그의 속성이 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은 힘없는 자고, 때문에 그러한 다윗을 아무리 저주해도 자신을 해할 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러한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힘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기에 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 나를 살린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 힘이 되어 여러분을 살리는 것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시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악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파묻혀 돈 버는 것에 모든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멸망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악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아는 자가 신자고, 자신이 곧 악의 덩어리이기에 악의 결과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존재함은 악을 이기는 다른 힘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이 힘이 되지 못하고 세상이 결코 자신을 살릴 수 없음을 아는 자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근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살리는 그 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는 힘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속성을 발견할 때 그것은 큰 근심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근심이 없이 산다는 것은 나를 살리고 있는 진정한 힘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6,17절을 보면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고 말합니다. 시므이는 홀로 다윗을 맞아 엎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명의 베냐민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이합니다.

왜 일천 명의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이할까요? 다윗이 자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즉 다윗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과 함께한 일천 명의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과 같음을 다윗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힘을 내세워 자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도 시므이의 속셈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므이에 대해 시므이가 예전에 했던 일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아비새란 사람은 시므이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아비새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비새란 사람의 사고방식은 죄있는 자는 무조건 징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26장을 보면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의 진중에 몰래 들어갔을 때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준 기회이니 사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정죄하는 것이 아비새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가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비새는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저주했으니 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아비새는 어떻습니까?

삼하 3장을 보면 아비새는 형 요압과 함께 아브넬이란 사람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다고 하여 복수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아브넬은 다윗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바치기로 했고, 그리고 다윗은 아브넬은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넬을 아비새가 요압과 함께 죽인 것은 다윗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복수를 더 염두에 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비새가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 일컬으며 그를 저주한 것을 죽어 마땅한 죄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의 뜻에 반하여 행동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비새 역시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는 귀신같습니다. 타인의 조그만 실수, 잘못은 가차 없이 지적하고 트집을 잡으며 분을 내며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실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를 못합니다. 마치 자신은 떳떳한 것처럼, 잘못이 없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잊지 말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를 했고 잘못을 했다면 나는 예수님에게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실수한 것을 보지 말고 내가 주님에게 범죄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이 무엇으로 인해 살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잊고 있는 나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보지 못할 것이고, 결국 악에 파묻혀서 악의 자식으로 그대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아비새의 말에 대해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22,23절)

다윗은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아비새를 오히려 자신의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을 대적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비새의 말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 됨을 방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알게 하는 역할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비새의 말은 다윗에게 잘못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왕 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이를 살리는 것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며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아비새의 말대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은혜가 여러분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를 살리는 은혜를 자랑하고 증거할 뿐,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힘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란 나를 살리는 은혜를 증거하고 함께 나눌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관계 안에서는 서로의 실수를 드러내고 트집 잡지 않게 됩니다. 무엇보다 형제의 실수를 말할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실수와 허물을 두고 트집을 잡는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을 향해 있습니까? 성경은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멸망의 모습인가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리고 날마다 자신을 두고 근심하며 회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