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 사무엘하 19:11-15 다윗의 마음

<본문>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사무엘하 19:11-15)

<설교>

세상은 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권력이 탐이 날 때는 얼마든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밀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누가 왕이 되든 정치를 잘해서 자신들을 편히 살게 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안에서 반역이 일어나 왕을 밀어내고 백성들도 이에 동조하여 반역자인 압살롬을 지지하게 됩니다. 다윗보다는 압살롬이 더 신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에서 압살롬은 죽고 반역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지지했던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는 말을 합니다.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왕이라는 존재성입니다. 사람들이 추대해서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왕 앞에서 백성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을 자기들 마음대로, 자신의 유익을 따라 교체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압살롬이 마음에 들 때는 압살롬이 좋다고 하고, 압살롬이 죽고 반역이 실패하자 역시 다윗 밖에 없다며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한 이들의 모습이야 말로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 세우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나 사실 왕께 대한 복종은 생각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왕 앞에서 내 유익만을 구 할 뿐 왕께 복종하는 것이 백성의 본분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예수 나의 왕’을 외쳐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사는 것은 자기 멋대로 입니다. 왕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왕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즉 왕이라는 것을 외칠 뿐 왕을 섬기는 백성다움은 모두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도 대부분이 자기 유익이 목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밖에 걸어놓은 간판일 뿐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유익에 의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다윗이 어떻게 대하는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린 이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음으로 여러분의 내면에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압살롬을 좇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 오려고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다윗이 두 제사장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서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모셔 오려고 하는데 너희는 왜 이 일에 나중에 되느냐’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유다 지파는 압살롬의 반역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결국 같은 형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유다 지파는 다윗에게는 아주 괘씸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본다면 속히 왕이 되어서 그들을 징계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유다 지파로 하여금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 다른 지파보다 나중이 되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자신의 출신 지파라서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단지 자신과 같은 지파이기에 특별히 배려하는 차원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13절에서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라는 말을 하는데, 아마사는 압살롬이 자신의 군장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17:25). 그런 아마사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단지 같은 지파이기에 배려하는 차원은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압 역시 유다지파사람임을 생각해 보면 아마사가 같은 지파이기에 배려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다윗은 자신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을 든 유다 사람들에게 왜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요?

사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처음부터 다윗의 편에 서서 고생을 하고 전쟁을 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전쟁의 승리자인 요압을 대신하여 반역자와 함께한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우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떠할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실제로 20:10절에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하게 되는 것을 보면 결국 지금의 다윗의 처사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을 모셔오는 일에 유다 지파를 앞세우고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운 다윗의 처사는 또 다시 정치력의 부족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 다윗의 처사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린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결국 교회로 모였을 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만 발산될 뿐인 것입니다. 아마사를 죽이는 요압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특이성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개체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모이면서도 교회라 이름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세운 공로를 따라 상이 주어지는 보편적인 국가가 아닙니다. 인간의 공로는 아예 배제되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만 부각되어져야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공로가 있는데도 무시하고 은혜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공로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상이 하나님을 거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로만 움직이는 자연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 생존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로마서 1:2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그것이 곧 신자 아닌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다 신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만 발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로를 부인하고 은혜만을 높이는 자로서 다윗이 유다 지파에게 한 말을 생각한다면 과연 불평이 있게 될까요?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인을 범하고 그 남편을 죽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약 행한 대로 갚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셨다면 다윗은 당장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긍휼과 자비하심이 다윗을 존재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지 않았다면 반역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아마 반역에 대한 징계를 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자신은 왕 자격이 없음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됨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다지파에 대한 다윗의 조치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의 조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지파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돌아온다면 예전과는 다른 생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전에는 단지 왕으로 여겨주는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반역자에게 베풀어진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서 다윗을 왕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도로 왕으로 모시려는 일에 그대로 따랐다면 비록 다윗이 다시 왕이 된다고 해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 편한 대로 왕을 바꾼 것뿐이고, 비록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섬긴다고 해도 왕으로부터 베풀어진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명목상의 왕으로만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을 원하신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반역의 중심에 있었던 유다로서는 다윗에게 돌아올 염치도 명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이 먼저 제사장을 보내서 다윗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에 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압살롬의 군장이 되었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 군장을 삼음으로서 다윗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즉 그들의 반역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4절의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는 내용처럼 다윗의 말은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고, 다시 다윗을 왕으로 맞게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대로 압살롬을 반역하고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반역의 중심에 서 있다가 감히 다윗에게 나올 수 없는 입장이 된 유다 족속이나 지금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우상조차도 구세주로 여기고 왕으로 섬길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우리를 예수님은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를 도로 왕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용서와 긍휼과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9-20절을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며 믿지 않는 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니 열어달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자라면 예수님의 두드림에 문을 여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왜 예수님의 두드림에 문을 열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고 회개하는 열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를 알고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열심이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을 맛본 신자라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 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고 이러한 신자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일에나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나 영접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의지라는 것은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의지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왕을 교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러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다윗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가는 것이지요.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신의 공로나 자기 이익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요압을 대신하여 반역자의 군장이 된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운다고 해도 요압으로서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항상 내 차지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내게 오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되고 내가 잘못될 때는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일 자체를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넓고 깊은 사랑에 빠져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는 ‘내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용납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사랑을 맛본 사람입니다. 수시로 왕을 거역하고 반역하며 마음에 들 때는 왕이라고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을 돌리는 강퍅한 자에 불과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부르신 사랑을 맛본 자가 곧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마음에 멀어진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익이 목적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더 잘되느냐?’ ‘누가 더 복을 받느냐?’를 비교하는 경쟁 터가 아닙니다. 남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부러워 할 필요도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동일한 긍휼과 사랑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은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부르신 긍휼이며 사랑이고 자비인 것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