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강) 사무엘하 19:9-10 백성의 이기심

<본문>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사무엘하 19:9-10)

<설교>

요즘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도가 점차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인기도가 하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복잡하게 대통령의 지도력이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얘기는 다 접어 버리고 가장 간략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 사회의 형편이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자기 이익에 맞으면 찬성이고 맞지 않으면 반대입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현 사회가 자신이 생활하는데 얼마나 편한가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선과 연관 없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을 향한 마음도 항상 변덕입니다. 대통령이 내 놓는 정책이 당장 듣기에 좋을 때는 찬성하면서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반대해 버립니다.

옛날 왕정시대 때도 이 점은 동일합니다. 비록 백성이 선택하여 세운 왕은 아니라 할지라도 왕을 향한 마음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좋은 정책을 펼쳐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면 성군이라고 하면서 높였던 것입니다. 결국 왕이든 대통령이든 지도자를 향한 개인의 마음은 개인의 선(善. 이익)을 따라 항상 변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신앙의 세계 속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백성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신자가 신자의 이기심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복음에서는 멀어진 채 오직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의 이기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요압은 왕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 말합니다. 왕의 생명과 왕의 자식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해 줬더니 수고한 신복들을 위로하고 칭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역자인 압살롬의 죽음으로 울며 슬퍼하는 다윗을 향해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이 압살롬을 죽임으로써 다윗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를 외면하고 있는 다윗을 향한 섭섭한 심기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요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9-10절의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압살롬 편에 있었던 백성들이 이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오자는 의견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장을 보면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술수로 인해 다윗보다는 압살롬이 왕으로서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직 누가 더 자신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들이 왕을 택하는 기준은 자기 이익이었으며 결국 자신을 이롭게 해줄 것으로 여겼던 압살롬이 다윗의 군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다시 다윗의 편에 서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한 사람을 향해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다면 압살롬은 감히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압살롬을 잃고 애통해 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백성들의 반역도 한 몫 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압살롬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고통 받는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압살롬이 반역하고 다시 압살롬이 죽고 그로 인해 다윗이 애통해 하며 고통을 겪는 모든 일에 자신들이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 모든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 했으니 죽어 마땅한 것으로만 여기고, 백성들이 왕으로 세운 왕이 없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 오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인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백성들은 다윗의 울음에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다윗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 앞에 나오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저 ‘우리가 세운 압살롬이 죽었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백성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 아무리 파렴치하고 못된 짓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비판을 참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판 자체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의 처분을 묻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거기에 몰려있던 모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꽁무니를 뺄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분기가 등등하여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간음한 여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판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 자들의 몫일뿐입니다.

성경은 파렴치하고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할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악한 자인가를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말씀에 머물러 있을 때는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교제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울음이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추구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은 변함없이 나의 왕이고 나는 그의 백성이라는 굳건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누가 우리를 살게 좋게 해줄만한 왕인가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백성들의 이와 같은 이기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모든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을 안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님의 고통이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임을 깊이 자각한다면 고통의 현장인 십자가 앞에 나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내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면서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무작정 요구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일까요?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이라면 나로 인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생각하며 나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섬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자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익으로 인해서 이웃이 겪을 수 있는 피해와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웃에게는 짐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이며 이러한 교회가 증거하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개혁이라는 것을 꾀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인해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 이웃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별로 관심도 없는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도록 했고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의 현장에 버젓이 서 있는 나의 모습은 보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나의 유익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이기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영생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의 이기적인 입장에 서지 마시고 애매하게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신앙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마음이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라는 애통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 나 좀 위로해 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을 앞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만 예수님을 찾는 것일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으로 십자가를 아는 것도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님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면, 결국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도움이 될 듯하고 믿으면 유익이 생길 것 같은 예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복음에 대해 기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마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죄로 인한 애통이 없다면 분명 그것을 신자로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중요성을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편히 먹고 사는 것입니까?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딜 가도 웰빙 문화, 웰빙 음식 등등 웰빙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웰빙’이라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삶을 누린다고 해도 유효기간은 분명 있습니다. 목숨이 끝나는 날, 아니 몸이 늙어가고 건강을 잃을 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은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동행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남보다 못 먹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 해도 나같은 죄인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행복과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기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니다. 피 흘림이 누구로 인한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왕이십니다. 비록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유익이 없다고 여겨진다고 해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오셨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건짐 받고 해방된 자로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이 마음이 넘치는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