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 사무엘하 19:1-8 요압의 불만

<본문>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사무엘하 19:1-8)

<설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마음에 대해서 도외시한다면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린 십자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

솔직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안되는 일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없던 돈도 있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감사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항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것입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돈을 마음에 둔다면 그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기 위해 효도를 가장할 뿐입니다. 많은 유산을 받기 위한 잠시 동안의 술수인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 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이런 수준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왜 나 같은 자를 위해 피 흘리고 죽는 길을 가셨는가를 헤아릴 때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날 수 있는 것이고 그제야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 아픔을 헤아리지 않을 때 우리의 관심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며 대신 나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가 아무리 십자가를 외치고 은혜를 말한다고 해도 그가 노리는 것은 이미 다른 것이기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승리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과 승리와 상관없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의 슬픔은 단순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에서 보게 된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이며 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승리로 인한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1절)라고 고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왕이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승리한 자로서 당당하게 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한 것처럼 가만히 성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3절).

이처럼 다윗의 슬픔 앞에서 백성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는 기쁨의 사건이지만 다윗에게는 슬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요압이 불만을 갖게 됩니다. 6-7절의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는 내용을 보면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압살롬이 살고 자신들이 다 죽기를 원했다는 것처럼 다윗을 몰아붙입니다.

요압의 불만은 압살롬의 죽음보다는 자신들의 수고와 승리를 높여주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심정보다는 자신들의 승리가 높여지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행위와 수고가 높여지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현실로 날마다 발생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과거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찌 예수님의 죽으심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마음에 둔다면 과연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에 나와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공로, 나의 수고, 나의 기쁨이겠습니까? 아니면 죽어야 할 원수인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의 공로와 수고는 가당치가 않습니다. 내가 담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와 있는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에게는 다윗의 슬픔 따위는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슬픔은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고 불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만을 보입니다. 십자가만을 말할 때 십자가가 진리며 십자가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면서도 왜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에 대해서도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자신들도 높여지기를 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기도하고 말씀 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때에 그 분께 받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시는 내용이 얼마나 신령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참생명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느끼는 기쁨과 재미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현실의 형통과 안락을 위해 눈앞에 벌어진 문제의 해결에만 관심을 쏟아 붓습니다. 교회생활만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모든 신앙 행위와 현실의 삶을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됨을 고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압이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다윗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이 얻어낸 승리의 기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린 요압의 불만을 보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불만에 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의 관심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압살롬의 죽음의 여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을 생각지 않은 요압은 승리와 전공에 마음을 뺏겨 압살롬을 죽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공로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이 오늘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이 복 받고 잘사는 것입니까? 많은 일을 하여 하늘의 상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 예수님이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십자가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 역시 당연히 십자가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세워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신자의 수고와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와 열심에 대해 칭찬하실 뜻도 없으십니다. 맥 빠지십니까? 봉사할 맛이 사라집니까? 요압과 같은 불만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 아닌 믿음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만 관심거리고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헛되이 되지 않고자 하는 욕심으로만 살아갑니다.

요압은 7절에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라고 요구합니다.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으니 그 마음을 위로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슬픔에 대해 생각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만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만약 다윗이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러한 요압이야 말로 현대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소위 신앙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나같이 예수님이 나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위로가 없고 평안이 없고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태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지 않는 증거입니다. 내가 위로 받기를 원하고 내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내가 잘살기를 원하는 이 목적으로만 예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말하니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을 찾으신 여러분,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습관처럼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위로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높여지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찾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임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 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만이 아니라 이 은석교회가 존재할 때까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모임의 이유이며 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