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 사무엘하 18:31-33 다윗의 슬픔

<본문>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1-33)

<설교>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오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어떠함을 점차 깨달아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감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그 삶은 십자가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가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막연하게 ‘나는 예수 믿는다’라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믿음의 세계가 분명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에 몸담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요?

우린 지난주에 아히마아스의 오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아히마아스의 오판은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압살롬이 죽은 것이 다윗에게 슬픔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반역자를 물리치고 승리하였으니 기쁨이 더 클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히마아스는 ‘승리했다. 기쁘다’는 생각만으로 다윗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의 소식을 접한 다윗의 관심은 승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압살롬의 안부에 있었습니다. 결국 구스 사람으로부터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3절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고 말하는 이것이 다윗의 반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같은 반응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십니까? 즉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단순한 슬픔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삼하 12:15절을 보면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나단의 책망이 있은 후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하나님이 치시매 그 아이가 심히 앓게 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자 모든 신하들은 다윗이 더욱 심히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다윗은 오히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에 비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단순히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죽음에는 다윗의 죄가 묻어 있습니다. 즉 다윗의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나단이 다윗을 책망할 때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2:10-11)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나단의 책망을 기억한다면,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죽음에는 자신의 죄가 들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의 죽음은 단순히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아들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다윗의 슬픔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승리의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습니다. 구스 사람까지도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의 말에 대해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32절)라는 말을 함으로써 다윗의 슬픔과 애통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같은 내용을 통해서 믿음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가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쁨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슬픔과 애통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십자가는 슬픔과 애통의 현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신 그 현장이 곧 십자가인데 과연 십자가의 현장에서 승리로 인한 기쁨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십자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승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구원과 승리가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본다면 구원과 승리로 기뻐하기 보다는 나의 악으로 인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세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담긴 은혜의 분량을 조금이나마 알아감으로써 기뻐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자의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세계를 모름으로써 예수를 말하되 예수님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여 자신의 문제로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모습만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히 서 보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치부를 드러내고, 여러분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는 옷들을 하나씩 벗겨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가리기위해 걸쳤던 것을 벗기신 것처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걸쳐 놓은 모든 것을 벗기시고 대신 하나님이 만드신 의의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부각되고 우리의 부끄러움의 실상이 여지없이 발각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있을 것은 나의 수치로 인한 애통과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요압이나 아히마아스, 구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다윗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승리로 인해 기뻐할 뿐 자신들의 승리에 압살롬의 죽음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을 때 사람들을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며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취업을 한 배경에는 누군가 다른 한 사람이 취업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복을 위해 복에서 밀려난 것입니까? 만약 그 두 사람이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처럼 내가 복이라고 여기는 일의 배경에는 다른 누군가의 아픔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만 기뻐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감사를 말한다면, 결국 자신의 유익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십자가를 벗어난 세계인 것입니다.

신자가 비록 편한 환경에 살게 되었다 해도 자신은 그러한 편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의 은혜임을 잊지 않는 것이 신자입니다.

다윗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은 것은, 압살롬의 죽음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를 다시금 생각하며 자신이 죽었어야 마땅함을 외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기쁨이 있는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는 다윗과 같은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압은 비록 압살롬을 물리치고 반역을 평정한 공신이었고, 다윗에게는 충성을 다 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의 원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했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담긴 승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에서는 ‘승리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것보다는 ‘나같은 자에게 이게 웬 승리입니까?’라는 반응으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의 신자는 설사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나같은 자가 그동안 편히 살아온 것도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상한 심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도 쉽게 ‘나는 예수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세계가 아닌 세상과 똑같은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내게 주어진 것으로 기뻐하고 또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참된 믿음의 고백으로 나온 것이라면 내게 주어진 것, 내게 있게 된 환경과 일들을 가지고 기뻐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상한 심령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외면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임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러니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부르며 ‘달라’는 외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을 치심으로써 다윗의 세계와 다윗의 세계가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승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세계와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음으로서 승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가 진심으로 진리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교회가 커지면 아마 목사가 제일 기뻐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충성하기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이니 내 것이 잘되는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요압과 아히마아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교회의 잘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나는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할 존재’라는 상한 심령이 유지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슬픔은 오늘날 우리가 과연 무엇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가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부디 애통과 아픔을 아는 마음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