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강) 사무엘하 18:19-30 아히마아스의 오판

<본문>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고하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저가 아무쪼록 달음질하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가로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서니라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파수꾼이 성문루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음질하는지라 파수꾼이 외쳐 왕께 고하매 왕이 가로되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저가 차차 가까이 오니라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음질하는지라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음질한다 하니 왕이 가로되 저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파수꾼이 가로되 나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왕이 가로되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사무엘하 18:19-30)

<설교>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간이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할지라도 신은 죽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분으로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계신다면 하나님이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그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지극히 엉망이 되버린 모습만을 보여주게 된 것은,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절대자이 신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탈피하지를 못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말하되 진리에서 멀어진 교회로 전락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우린 어떤 신앙으로 서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압살롬을 죽인 후에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절의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연락병의 역할을 하고 있던 아히마아스가 전생에서 승리한 소식을 속히 전하기 위해 요압에게 청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 때문입니다(20절). 즉 요압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윗이 너그럽게 대하라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것으로 인해 승리가 다윗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것임을 미리 짐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구스 사람을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 다윗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압에게 청을 하고 요압은 거듭 이 소식을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는 기어코 요압의 허락을 얻어 다윗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왜 이토록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압이 22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윗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함으로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아히마아스를 만류한 것은, 압살롬이 죽었기에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음질 하여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여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서 승리의 소식으로 인한 기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29절)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다만 크게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 압살롬의 죽음을 숨겼을까요?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나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즉 아히마아스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앞서서 하고 유리하지 않은 말은 감추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에게는 다윗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여 다윗을 기쁘게 함으로 상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슬픔이 되고, 분노가 될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은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생각지 못한 것은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의 안위에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든, 다시 왕위를 찾게 되었든 그것들은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히마아스의 생각과 사고는 다윗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의 신하라고 하면서,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윗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를 갖고 있다면 진정한 신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니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때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보겠다고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면 예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교회 부흥이 예수님께 기쁨이 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예수님과는 단절된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대한 봉사가 예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사도들 또한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에 앞에 나오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시 40:3-7절을 보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말한 새 노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하여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기존의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가 무너지고 새롭게 알게 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자기 민족을 위한 신으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고난 받으신 십자가를 보지 못하였음으로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십자가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교회를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결국 아히마아스가 승리를 전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유익만 꾀하는 수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히마아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도 나의 유익을 꾀하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게 돌아올 상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의 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앞에 나온 신자에게 새 노래는 무엇일까요?

새 노래는 우리 스스로 지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내가 명상을 하며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우침으로 자진해서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가 아닙니다.

다윗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새 노래는 내 스스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사고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기존의 그 모든 것이 깨어져야 비로소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인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십자가에서 새롭게 해석할 때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번제와 속죄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이 될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말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