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 사무엘하 18:16-18 압살롬의 기념비

<본문>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저희가 이스라엘을 따르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사무엘하 18:16-18)

<설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흘리신 그 피가 사람들의 죄를 씻고 용서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정통적 중심사상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은,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맞는 것이지 죄는 내가 범했는데 죄에 대한 해결은 다른 존재가 와서 한다면 죄 지은 사람은 마음껏 죄만 지으면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도덕과 사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길은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니 만큼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구원 역시 자신의 깨우침으로 얻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모든 것을 외부에서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자신이 지은 죄의 해결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기보다는 타자에게 맡기는 것이야 말로 무책임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마 손대지 않고 코푸는 것처럼 날강도와 같은 짓거리로 여겨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의 의미 또한 자기 스스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자기 책임 아래 선택할 수 있는 구원의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지극히 양심적이고 선한 생각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죄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곧 선한 양심이고 도덕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선한 양심, 선한 도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이나 유영모 씨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분들이 예수를 말하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분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지성과 사상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지극히 선한 양심적 생각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책임지기 위해 따라야 할 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삶과 가르침만 받아 실천할 뿐이고, 십자가에 죽으심도 예수님이 선한 삶을 직접 실천하여 보여준 것으로 여길 뿐이지 대속의 은총에 대해서는 그들의 선한 양심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해 포기하지 못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십자가는 인간에 대해 포기할 것을 외칩니다. 인간에 대해 포기하라는 것은, 이미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선을 향해 나아갈 그 어떤 힘도 가능성도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에 대해 포기할 때 자기 이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름을 통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죽고 없다 할지라도 이름이 있음으로 인해 여전히 세상에 남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일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해 역사 안에 자신의 흔적이 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그 누구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남길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선과 도덕을 바탕으로, 그리고 사회적 공헌과 업적을 바탕으로 많은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없이 홀로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세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압살롬이 살았을 때 한 일을 말합니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18절)고 말한 이것이 압살롬이 자신을 위해 한 일입니다.

압살롬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은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말하는데, 삼하 14:27절을 보면 압살롬이 아들 셋을 낳았음을 언급합니다. 이처럼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도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였다는 것은, 아들 셋이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압살롬의 이름을 높여줄만한 뛰어난 아들들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주는 존재입니다. 반면 아들이 못났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이 낮아지기에 사람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식은 이 땅에서 뛰어난 인재로 키우고 또 그렇게 만들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자식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파출부를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자식의 유학을 위해 가족이 흩어져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라는 칭호까지 들으면서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부모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뛰어날 때 덩달아 부모의 이름이 높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에게는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이것을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압살롬에게만이 아니라 아들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 심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위해 자기 스스로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석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컬음 받은 것입니다. 비석을 통해 후대의 사람들이 ‘압살롬’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이 이름을 남기기 위해 손수 비석까지 세울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을 하는 모습과 함께 성경은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언급합니다.

16-17절의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저희가 이스라엘을 따르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최후가 어떠했는가를 말해줍니다. 다윗의 아들로 살았을 때는 왕자로서 높임을 받았고, 반역을 한 후 한때는 다윗의 궁을 차지하고 왕의 자리에 앉은 압살롬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짐을 받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은 무덤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와 무덤을 말하고 압살롬의 기념비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이름에 집착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높였다 할지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뿐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설사 압살롬의 무덤이 호화로운 것이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로 인한 비참한 최후일 뿐입니다. 이러한 비참에서 우리를 건져낼 분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홀로 책임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겐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며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속의 교리가 인간에 대해 포기를 하지 못하고, 인간의 선과 도덕을 믿는 것으로 인해 거부를 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그 고백이 진리로 인한 고백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은 과연 내가 십자가 밑에서 나의 선함과 도덕을 믿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함과 도덕을 또한 의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착한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착한 일을 했기에 신자답다’는 생각 역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직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생각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죽음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모두가 인간의 선함과 양심에 그리고 의지와 노력에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함과 의지로 말미암아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도달했을 때 죽음은 지금껏 자신의 선함과 양심을,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살아왔던 인생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는 죽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꼭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마지막, 죽음에 자신을 세워둘 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압살롬의 기념비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야 하겠습니까? 압살롬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야의 언약 아래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적하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을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임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념비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싶습니까? 온 세상이 높일 만한 일을 해서 후손 대대로 그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합니까? 이게 너무 거창한 것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교회에서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 교인들에게 기억되어지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업적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함으로써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 힘으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게 하셨음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것이 자기 이름 높이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우리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은 사망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아무리 기억되고 높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지막은 결국 비참한 최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채우시기 바랍니다.

비참한 최후를 앞에 둔 자로서 생각해 본다면, ‘사망에서 나를 건지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는 고백이 자신의 기념비에 새겨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나를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한 것은 나의 선함과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다’는 고백으로 새기기를 원할 것입니다. 결국 내 이름이라는 것은 아무런 볼품도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임 받을 일을 해서 뭇 사람들로부터 이름이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라는 그 이름 앞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름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이름 앞에 나오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아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사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양심적으로 바르게 산 도덕군자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오신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보다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선함과 양심과 의지로 말미암아 스스로 말씀을 실천하여 죄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다만 모본으로 삼아 본을 받아야 할 성인으로 여길 뿐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잘 실천하여 따르는 것이 자신의 죄를 책임지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 자신 길을 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은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음을 알고 생명 되신 분 앞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우리의 이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깨달으시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생명이 있기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높이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사망을 저지할 수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의 귀함을 깊이 깨달으며 여러분의 죽음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기억되어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