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강) 사무엘하 18:9-15 압살롬의 죽음

<본문>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사무엘하 18:9-15)

<설교>

사람이 교회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교리적 내용일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백적 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한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학습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누구시며, 인간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성경의 중심 사상에 대해 지식적 차원에서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습에 의해 지식이 구축되고 그 지식으로 인한 고백을 그가 신자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이고 소양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죽을 때, 교회를 다니는 가족이 있으면 그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부모 형제가 죽어서 지옥 간다는데 마음이 무겁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다그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믿지 않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 한 말 한마디로 그도 천국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심적 위안을 삼고자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구원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결코 말 한마디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이 예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은 것이지 그의 말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정답이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성경에 맞게 말을 하고 신앙고백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쉽게 ‘나는 신자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조차 속이면서 선이든 신앙이든 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 하고 다윗도 함께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18:3)라고 권합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다윗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온 마음을 다해 다윗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을 알고 다윗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다윗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느냐에 있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에 보내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그것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5절). 다윗의 당부는 자신들 만 명 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소중한 사람의 당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그 말이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되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아마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마음과 뜻을 외면해 버린 거짓된 섬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요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노새를 탄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려 그가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상태는 누구에 대해서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압살롬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형편을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고한 사람에게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떡 하나를 주었으리라”(11절)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요압에게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였나이다”(12절)는 말로서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부당함을 고하였으나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게 되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들도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임으로서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압살롬을 가운데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 가지에 매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과 요압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은 자신이 힘이 없어 압살롬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 가지에 머리털이 걸려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한 자였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을 죽여 다윗에게 바친다면 그 공로가 인정되어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지시했던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압살롬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다윗의 그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오직 거기에 복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던 상관없이 압살롬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압살롬은 다윗을 대적한 반역자라는 생각과, 지금 그가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둔 채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진심으로 다윗을 섬기는 자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전쟁에 함께 나가겠다고 했을 때 왕은 ‘우리 만 명 보다 중하시오니’라는 말을 하면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던 백성들 속에 요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그처럼 높이 섬기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말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기력한 상태의 압살롬을 만나자 자기 성깔대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을 두고 진심으로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다윗 앞에서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겉만 번지르한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속에 굳게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외쳐봐야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과 일치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말과 삶은 각기 독립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눈물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죄인의 죄인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마치 요압처럼 내 생명을 다해 예수님만 믿을 것을 다짐하면서도 막상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만 자신의 뜻과 마음을 따라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요압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본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름 없는 어떤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요압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는 지금껏 요압식으로 살아왔음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내 속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산다면 그 모습은 모든 삶에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기 마음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여겼던 내가 결국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게 될 것이고, 은혜를 담고 있는 마음에서 과연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아무리 복음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외면한다면 그의 말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의 말은 은 천개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자인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은 천개가 아니라 은 열 개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말씀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크신 분으로 다가온다면 자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게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