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 사무엘하 18:1-8 신자의 품성

<본문>

이에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심복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삼하 18:1-8)

<설교>

항간에 보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해 버리는 행태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을 했다 하여 마치 기독교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착하게 사는데 몇 몇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착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의미가 착한 사람을 양산하는데 있는 것이라면, 성경은 착한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볼 때마다 실천은 없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 넘어 감으로써 세상을 의식하면서 ‘믿음의 실천자’, 즉 착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믿음에 온전히 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멸망의 대상에 불과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에 신자라는 것은 인간의 착한 행실과는 무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서 죄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속에는 죄의 본질이 도사리고 있고, 항상 드러나는 것은 죄의 흔적들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는 착한 행실을 요구하겠습니까?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 ‘죄 안짓겠다’는 다짐이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또한 신자의 본질도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잘 압니다. 내 힘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죄를 이기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에 대해 깊은 감사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 안에서도 태반이 신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신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믿음을 말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관심도 없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엉뚱한 길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어리석음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동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말하면, ‘내가 왜 회개를 해야 하느냐?’라며 반발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알고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는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배운 성경의 교리적인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줄줄 얘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죄인임을 안다면,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은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그 어떤 의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의지한다면, 그에게서는 사랑과 긍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나, 행함이나, 열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이 일을 이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면서, 또 다시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군사를 정비하여 압살롬을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다윗이 그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군사를 세 대로 나누어 압살롬과의 전쟁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압살롬의 군사와 전쟁을 하게 되고, 결과는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 항상 그렇듯이 군사력과 조직력으로 싸워 승리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말은 칼로 인한 승리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수풀에서 죽은 자가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칼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고 그것은 결국 칼이라고 하는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승리, 즉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이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고백하는 신앙적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그 고백이 거짓이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승리의 조건과 여건이 전혀 없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비록 군사가 있고, 칼이 있고, 조직을 갖추었지만 그것들이 나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군사가 있고 칼이 있고 조직이 있다 할지라도 믿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군사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패배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자란 이기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기게 하시는 분도 패배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승리했다면 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자 해야 할 것이고, 패배했다면 패배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을 하면서도 승리를 위환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두고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사람이지 자신의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을 해 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군사와 칼 조직력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일 뿐이지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다윗이 군사도 없고 칼도 없이 무기력한 상태라 하리라도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대 누가 그 뜻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패배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수많은 군사와 칼을 가지고 나선다 할지라도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승리든 패배든 하나님께 달렸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 아래서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승리든 패배든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면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내 속에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그 결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 신자의 바른 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 기독교는 신앙에서 많이 왜곡되어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말하면서도, 마치 날 위해 살아계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모든 일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정해 놓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승리하게 하신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죽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살고 죽는 것이 우리의 뜻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또한 어떤 질병에서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죽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떤 노력을 다 기울인다고 해도 죽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병에 걸렸을 때 '내가 병을 치료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죽게 하신다면 죽을 것인데 병원에 갈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되 여건과 환경들을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더욱 갖추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든 주어진 결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결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를 쓴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께 달렸음을 생각지 않는 실제적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을 들어 승리하게 하셨지만, 사실 다윗이 이겨야 한다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이겨야 한다는 근거를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을 했으니 압살롬이 악하다. 때문에 압살롬은 패해야 하고 다윗은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다시 주지해야 할 일은 다윗은 결코 선한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을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어 주어야 할 근거는 다윗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편을 드시는 근거이며 이유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열심히 교회를 다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입술에서 고백되는 죄인이라는 말은 한낱 위선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에게서 백사장의 모래 한 알만큼의 의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죽어야 할 자가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자비하심입니다. 따라서 승리했다 할지라도 승리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죽어야 할 자가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며, 죽는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은혜요 자비였음을 고백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자리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신자의 품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생존하게 하시고,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시험과 위험에서 건져 보호하시고,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인이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분만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체험하고 확신했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와지는 고백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자다운 품성은 인격도 도덕도 아닙니다.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것은 인격이 아니고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자신의 악함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넘치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넘치는 것들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품성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과가 승리로 나타났다면 나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게 하시니 감사하게 될 것이고, 패배하게 하셨다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내 의로움도 내 노력도 아니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품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