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2:18-29 복수심

<본문>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같이 빠르더라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저가 치우치기를 싫어하매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의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가 기아 맞은편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떼를 이루고 작은 산꼭대기에 섰더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요압이 가로되 하나님이 사시거니와 네가 흔단의 말을 내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아브넬과 그 종자들이 밤새도록 행하여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설교>

타 종교의 소위 경전이라는 책들을 보면 모두가 듣기에 좋은 내용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가르침으로 망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성경을 보면 때론 ‘이런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성경’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서신서들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는 이방인들도 많이 애용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가령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씀이나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나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문구 자체만으로도 누구든 하나의 교훈과 덕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들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고 사도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모두 자기들의 상식과 도덕을 기초로 하여 해석해 버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교훈적인 내용들이 성경에 걸맞다는 생각을 우리 역시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가르침이 같은 부분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말씀들을 자신들의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조차 ‘성경의 가르침이 타 종교와 같은 부분이 많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도 도덕적 이해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구약의 내용들은 많은 혼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을 하는 내용이나 소위 사랑의 하나님으로 불려지는 하나님이 이방인들 죽이기를 파리 죽이듯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조차 범죄했을 때 순식간에 몇 만 명씩 죽이는 것을 예사로 해버리는 이 일들을 과연 우리들의 도덕적 기준에 맞는 내용들입니까? 그래서 ‘같은 부분이 많다’고 말하는 불교도 구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문구상으로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내용들 몇 가지를 말하면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같다’는 말을 하면서 기독교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받고 불교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받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도 서서히 인정을 하는 분위기라는 것에 대해 신자로서 크게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깊고 바른 이해입니다. 우리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을 깨닫기 위해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런 내용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무런 교훈도 가르침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패로 갈려져서 서로 싸우는 내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떠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구약은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이 이방인과 부딪히며 살았던 이야기나 이스라엘이라는 자기들 민족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남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 그들 얘기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오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의 잘못됨과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이야기도 ‘너희도 이렇게 살지 않느냐?’라는 외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두 세력의 계속되는 싸움의 내용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아브넬과 다윗 편에 있는 요압이 서로 싸우게 된 내용이었는데 17절을 보면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한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18,19절을 보면 요압에게 아비새와 아사헬이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발이 들노루 같이 빠른 아사헬이 싸움에 패하여 도망을 치는 아브넬을 뒤쫓아 가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사람을 기어코 죽이겠다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싸움에서 패해 도망을 치는 아브넬을 그토록 집요하게 죽이려고 쫓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요압과 그 형제들이 다윗과 함께 사울을 피해 다녔던 것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사울 때문에 고생을 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히 사울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넬에 대한 개인감정 이라기보다는 아브넬이 사울 쪽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아브넬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화풀이이며 복수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것은 곧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하 우리가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본문 역시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구 한 사람 복수심이 없이 사는 분이 있습니까?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이 어우러져 불일 듯 일어남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아벨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받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너 때문에’라는 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본성이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우리들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급차를 보면 괜히 흠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고급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이라도 나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며 고생을 한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또한 사울 쪽에 대해 원한을 가진다면 요압의 형제들보다는 다윗이 더할 것입니다. 다윗은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를 않았습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미움도 복수심도 없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야를 죽인 것을 보면 다윗 역시 우리와 동일한 악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울을 죽이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살려준 데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윗의 미움과 복수심을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다윗과 함께 사울에게 쫓기며 고생을 한 배후에 하나님을 계셨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고생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있다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결국 원한과 미움만 자리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아브넬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이 일을 있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신자로서 옳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물의 주관자로 일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이 마음이 미움과 복수심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머리털 하나까지 세고 계신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존재를 감히 누가 자신들의 뜻대로 해할 수 있겠습니까? 혹 그들 뜻대로 신자를 해롭게 하였다면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가면서 깨달아야 될 우리들의 숙제인 것입니다.

나는 돈이 없는데 저 사람은 돈이 많다는 것만 생각하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게 됩니다. 돈 많은 자가 이웃을 도울 때에도 ‘돈 많은 것 자랑한다’는 식으로 고깝지 않게 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아간다는 인생의 원칙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돈을 가지지 못한 것이 돈 많은 사람들의 탓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입술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보면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게 됩니다. 20,2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가로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내로라 아브넬에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치우치기를 원치 않고 그 뒤를 쫓으매”라는 내용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에게 자신을 쫓는 것을 그만 둘 것을 간청합니다.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소년을 잡아 그 군복을 뺏는 것으로 대신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넬도 아사헬이 자신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쫓아오는 것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넬의 요구를 거절하고 계속 쫓던 아사헬은 결국 아브넬에게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아사헬이 죽자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산꼭대기까지 추격을 합니다. 아사헬까지 아브넬에게 죽었으니 복수심이 더욱 커졌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요압에게 아브넬이 이렇게 외칩니다.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27절)

요압의 말은 칼로써 보복을 하는 것은 서로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뿐이며 같은 형제를 쫓는 것이니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은 아브넬의 말을 듣고 쫓기를 그만두고 다시 싸우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곧 나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미움이 있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미워하는 그가 바로 나의 형제라는 사실부터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형제 되게 하신 관계에 함께 있음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형제란 서로 싸우고 미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관계입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하면서 미움과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면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말하는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 묻어나옵니다. 교회에서의 어떤 행위를 가지고도 신앙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가식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요압과 그의 형제들은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됨으로써 모든 고생이 끝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생은 지나간 것으로 여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고생했던 세월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사울만 아니면 편히 살 수 있었는데 사울 때문에 고생한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사울쪽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요압과 그의 형제들은 다윗의 신복들입니다. 다윗을 따라다니면서 다윗이 사울에게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행하는 것은 다윗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윗의 신복으로 다윗을 따라 다녔으면서도 다윗을 배우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마음은 다만 다윗의 마음으로 남겨 버리고 자신들은 자신들의 마음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런 수준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르는 소위 예수님의 제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에게서 예수님의 것을 보고 배우는 위치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고, 예수님의 것이 내 것으로 되어져야 제자답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되 예수님을 배우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여겨버리고 우린 우리의 삶을 따로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라 하면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제자는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다윗을 따랐으나 다윗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미움과 복수심을 드러낸 요압의 형제들처럼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나 예수님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예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지 못한 채 날마다 나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놓아서는 안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개입된 인생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나간 세월 고생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고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생이 끝나고 편한 삶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에게는 ‘누구 때문에’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뜻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내 소망과 원하는 것이 훼방을 받고 무너진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 때문’이라는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린 다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애매하게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은 결코 세상에 대한 복수를 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항상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살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악한 우리의 본성입니까? 함께 형제된 관계에 있으면서 싸우고 경쟁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여 누군가에 대해 미움이 있고 복수심이 있다면 인생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어진 것임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신앙이 악한 본성인 미움과 경쟁과 싸움과 보복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의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는 예수님의 제자로 남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