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사무엘하 17:5-14 하나님의 도우심

<본문>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저의 말도 듣자 하니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저에게 말하여 가로되 아히도벨이 여차여차히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않거든 너는 말하라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 때에는 아히도벨의 베푼 모략이 선치 아니하니이다 하고 또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이제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좇는 자 가운데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비록 용감하여 사자 같은 자의 마음이라도 저상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부친은 영웅이요 그 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나의 모략은 이러하니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사무엘하 17:5-14)

<설교>

힘을 향한 인간의 욕심은 도무지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힘이 있는 곳에 인간의 욕망은 분명히 자리하고 있고 힘을 따라 욕망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힘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힘은 참으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인간을 이끌고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양심이나 도덕, 윤리까지 외면하게 하는 것이 바로 ‘힘’이라는 괴물입니다. 힘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으로 존재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가서는 안 될 길도 마다하지 않고 서슴없이 가게 해버리는 유혹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힘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처럼 원하는 힘을 성경은 거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욕망과 부딪히는 현장으로 다가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자신의 성공의 길을 보려고 합니다. 힘이 있어야 세상에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과연 진리를 찾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성경을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진리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 희귀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는데, 과연 우리의 관심이 진리에 있고 예수님에게 있는가를 나 자신에게 솔직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성경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을 제시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학교에 간다거나, 사업이 잘된다거나 자식이 성공할 수 있음을 말합니까?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악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것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것입니다. ‘힘없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굳어 있기에 힘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발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든 믿음으로 인해 복이나 받았으면 하는 욕망에 묻혀 사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이 하루하루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무엘서를 보면서 다윗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인도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인생에 대해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앞섭니까? 다윗에게서 과연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의 왕이고,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약속까지 주어진 몸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다윗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왕으로 택하시고 하루아침에 사울을 몰아내고 다윗을 왕위에 앉혔습니까?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결국 살아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인생은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도우심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도우시는 것 말고 한꺼번에 도와서 큰 것으로 채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푼돈 말고 목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도움 받으며 사는 것은 전혀 힘이 되지 않고, 한꺼번에 왕창 도와주실 때 힘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작은 일이 아닌 큰일에 도움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닥치는 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도우시는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윗을 괴롭히는 사울을 죽여 버리심으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날마다 여러분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큰 도움, 나에게 힘이 되고 득이 되는 도움을 원하기에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이 주어지고 살아가는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다윗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하나님이 누구를 돕고 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요? 분명 사람들은 누구든 지금의 일이 잘되고 있는 쪽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를 잘되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을 추구하는 인간이 상상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다윗을 압살롬 편에 서서 그를 돕고 계시는 것입니까? 물론 나중에 압살롬은 죽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에 압살롬 편을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압살롬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압살롬은 자신이 나중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지금 되는 일을 보면, 다윗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도망을 치고 자신의 일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을 돕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다윗을 돕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다윗을 도우시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우심은 반역을 한 압살롬을 당장 멸망하시고 다윗을 성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다윗을 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야 말로 멋있는 도우심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당장은 압살롬의 일이 잘되게 하시는 것에서 다윗을 돕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히도벨의 일만 이천의 군사를 데리고 가서 다윗을 죽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섬기게 하겠다는 계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아히도벨의 계략을 옳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음도 말씀드렸습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옳게 여김으로써 그들 역시 힘을 추구하는 악인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옳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힘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옳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부당하다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마치 의인이 고통당하고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이 부당하다 여겨져 항의한 하바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이고 반역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계략을 말하자 압살롬은 후새의 말도 들어보자고 합니다. 압살롬은 후새를 불러 아히도벨의 계략을 말해주고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후새는 아히도벨의 모략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몹시 격분해 있을 것이고, 또 다윗은 어느 굴에 숨어 있을 것인데 그런 다윗을 잘못 치다가 혹 좇는 자가 먼저 몇이 죽게 되면 소문은 압살롬이 패한 것으로 날 수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기울 수가 있으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새는 자신의 모략을 제시합니다. “나의 모략은 이러하니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저를 엄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같이 저의 위에 덮여 저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또 만일 저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한 작은 돌도 보이지 않게 할것이니이다”(11-13절)

후새의 모략은 군사를 많이 모아서 압살롬이 친히 전쟁에 앞장서서 나가서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을 전멸 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모략을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후새의 모략을 따르고자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다윗을 돕고 계시는 결과였다는 사실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즉 후새의 모략은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기 위해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후새는 다윗이 들여보낸 첩자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에게 후새를 가게 하신 것 까지 다윗을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의 위기에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했다면 다윗이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에 하나님은 후새를 보내시고 더 나은 것처럼 여겨지는 다른 모략을 제시함으로써 다윗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 편에서는 이러한 일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전혀 알지 못한 가운데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중지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못마땅함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다면 후새를 보내서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버리게 하는 것보다는 다윗에게 힘을 주셔서 압살롬을 치게 하신다든지 아니면 압살롬이 있는 지역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심판을 하시는 방법으로 다윗을 돕는 것이 더 폼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위기 상황에 있는데 정작 하나님은 다윗을 돕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의 도움을 환경의 변화 또는 개선으로 이해합니다. 위기 상황에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신의 도움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 상황은 그대로인데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신뢰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환경의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설령 환경은 그대로이고 어려움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새를 통해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산시킴으로서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며 돕고 계십니다. 비록 다윗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다윗은 돕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시 여러분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여러분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굳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내게 불리하게 된 것 같다 해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불리함이 유리함으로 바뀜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돕고 계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돕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우시니까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대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로 나오게 할 뿐입니다. 또한 그러한 기대 자체가 곧 악일 뿐입니다.

세상 일이 잘되든 못되든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바라보고 살필 것은 오직 영혼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환경을 본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의 생명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의 흔적은 분명 보여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고통 가운데 있어도, 힘없는 약자로 살아도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비록 겉으로는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의 장래는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되어지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겉으로는 세상이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내막은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내막은 멸망으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우십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힘있는 자가 되도록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잘됨을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에서 발견하시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들도, 원망의 조건에 불과했던 형편들도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 순간들이었음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음을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