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강) 사무엘하 17:1-4 옳게 여김

<본문>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사무엘하 17:1-4)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아히도벨의 모략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이와 같은 모략을 내어 놓은 것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자들이 압살롬과 다윗이 화해할 수 있다는 염려를 미리 제거함으로써 신하들이 오직 압살롬에게만 충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리로 따지자면 아히도벨의 말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으로 여겨질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모략은 누가 생각해도 뛰어난 계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히도벨의 계책이 오늘 본문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계속해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으로 왕께 돌아오게 하리니 무리의 돌아오기는 왕의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고 합니다.

아히도벨의 계책은 자신이 군사 일만 이천을 이끌고 다윗이 곤하고 약해 있을 때 다윗을 쳐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만 죽이면 다윗을 따르던 모든 백성들도 압살롬께로 돌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평안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계책은 결국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히도벨의 계책은 분명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누구하나 아히도벨의 계책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임을 고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압살롬이야 반역의 주동자이니 그렇다고 해도 이스라엘 안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 장로들까지 아히도벨의 말을 옳게 여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계책은 압살롬의 반역의 성공을 굳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계책이 장로들에게까지 옳게 여겨진 것이야 말로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열망으로만 가득차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면 아히도벨의 계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분명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일임을 알고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압살롬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히도벨의 마음이나 압살롬과 장로들의 마음이 서로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성공을 위하는 그 마음이 서로 교통하여 아히도벨의 말이 옳게 여겨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히도벨의 말이 옳은 계책으로 여겨집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다윗은 좋은 편, 압살롬은 나쁜 편이라는 생각으로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의 말이 여러분의 성공을 도와주고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십중팔구 이스라엘 장로들처럼 그 말을 옳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개업하는 집에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이 성공하고 크게 번창하는 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잘못된 것으로 들려지겠습니까? 아니면 지극히 타당하고 옳은 기도로 들려지겠습니까? 그 마음에 성공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러한 기도는 아주 타당한 기도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기도에는 아멘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개인의 성공을 향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음이 전해질 때 그 복음의 내용을 옳게 여기지 않는 것은 성경을 잘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마음이 복음에 일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옳게 여길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믿으면 복 주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성공과 자기 이익을 위해 산다면 그 사람은 성공과 이익을 선포하는 거짓 복음이 옳게 여겨질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 생각에 일치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에 내 모든 생각이 고쳐지고 새롭게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 인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구별해 들을 수 있는 지혜로 살아가기를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소원들, 즉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나의 일이 잘되기를 원하는 이 생각과 소원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진리가 아닌 말을 옳다 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 인해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방종한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들이 멸망을 받아야 마땅하나 의인이 있으면 멸망치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세대의 멸망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당연히 의인에게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내가 피할 피난처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도움이시고 힘이 되시는 분이지 세상을 힘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성공을 외치는 말, 세상에서 힘을 얻는 것을 복이라고 외치는 말들이 옳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시고 믿음의 중심 위에 굳게 서 보십시오.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고 강조하는 말들이 왜 복음에서 벗어난 인간의 소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말하되 믿음에 서 있지 않기에 믿음이 아닌 것을 말해도 그 말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나의 성공, 나의 잘됨을 위해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다만 그분만을 의지하고자 할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것만이 심판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인생의 성공을 엿볼 수가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피흘리신 현장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잘됨과 세상에서의 행복을 약속하고 보장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의 승리는 힘의 결과가 아니라 포기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시는 버림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나에게 나오라 성공하게 하겠다’ ‘나를 따르라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버림의 길을 가신 것처럼 신자가 가는 길도 버림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말이 옳게 여겨지십니까?

세상은 나를 잘되게 하는 신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자신의 잘됨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공을 원할 때 자연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말하기는 하겠지만, 십자가의 마지막에 교회의 성공을 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버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것으로 채워지는 것으로 보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아히도벨의 계책과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사도들의 행적들이 마치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한 위대한 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사도들을 세워서 일하시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사도들처럼 열심을 내서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말을 하게 되고, 그러한 말들이 옳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직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여 봐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심판의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용서의 기쁨과 감사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무엇이 복음이 아닌 말인가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돼봐야 결국 마지막은 심판이며 멸망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 여러분을 살리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확고히 하시기 바랍니다.

성공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복음의 진실된 외침을 듣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복음의 소리에 못마땅해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중심에 내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기 전 다시 한 번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현장에서 과연 나의 성공과 잘됨을 요구할 수 있는지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과연 무엇이 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