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사무엘하 16:15-23 아히도벨의 모략

<본문>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저와 함께 이른지라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 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그 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사무엘하 16:15-23)

<설교>

세상은 힘을 자기의 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합 1:11). 이러한 세상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 3:19)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린 우리 자신을 가리켜 신자라고 스스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신을 삼는 자들은 힘으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왕성하여 가는 반면에 주 여호와를 힘으로 고백하며 사는 신자들은 다 빼앗기고 압제받는 길을 걸어가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기뻐하며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신자로 인정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라면 과연 그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요? 성경을 근거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 비취는 교회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신자들이 모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자기 힘으로 신을 삼는 자들이 다만 신자라는 껍데기만 걸치고 모이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걸치고 있는 신자라는 껍데기를 벗기시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악한 모습들을 들춰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사는 신자라면 그 신앙은 자신의 힘을 구하고 모으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모습은 이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불러 자신의 힘을 구하고 힘을 모으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힘을 정당화 해버립니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힘있는 신자로 만드시는 분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런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 역시 힘으로 세상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증거되지도 않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거의 전부가 여러 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국한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선교사라면 아프리카로 갈까요 중국으로 갈까요,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음식점을 할까요 의류업을 할까요, 진학을 한다면 A대학을 갈까요 B대학을 갈까요, 이처럼 여러 길에서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모습이 보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일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켜 묻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어떤 일을 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있는 자로서 모든 일을 하라는 것이 우리를 행한 하나님의 일차적인 뜻이지 우리더러 무슨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하게 해서 성공하게 하고 그러 인해 영광을 받고 힘이 있는 자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힘있는 자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보십시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로서 세상에 힘있는 자로 세워졌던가요?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로 말미암아 매 맞고 쫓겨나는 인생으로 부름 받았을 뿐입니다. 사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그들 역시 하나님께 부름 받고 복음을 위해 쓰이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분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성공의 길을 갔던가요? 그들 역시 매 맞고 죽음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있던 자들은 하나같이 힘이나 성공과는 상관이 없이 약자로서 압제받는 길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나의 힘을 구하고 힘있는 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기를 원한다면 그는 분명 주 여호와를 힘으로 삼는 신자는 아닌 것입니다.

계획한 일이 잘되어 가고, 되어가는 상황들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면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잘되는 것에 그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증거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며 이 뜻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약자로 부르셨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즉 힘과 상관이 없는 존재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무지함으로써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동일하게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끌어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한 듯 보여집니다. 다윗은 도망을 쳤고 다윗의 친구 후새까지 다윗을 외면하고 자신을 섬기겠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16절에 보면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아올 때에 저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라고 말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투항하는 것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어 정탐하고자 한 다윗의 계략이었습니다. 압살롬도 후새가 다윗의 가까운 친구였음을 알기에 ‘왜 다윗과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이젠 압살롬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후새의 말을 믿게 됩니다.

이처럼 반역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압살롬은 무엇을 생각하게 되겠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불의와 정당함은 생각하지 않고 설사 불의한 일이라 할지라도 순탄하게 잘되면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면 하나님이 막으셔야 하고 그렇게 되면 분명 실패하게 될 것인데, 잘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돕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잘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것은 그 영혼이 잘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일의 잘됨이 아니라 영혼의 잘됨과 강건을 위해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잘됨을 위해 하나님은 때로 자기 백성에게 고난과 실패의 길을 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의 잘됨과 실패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직 모르는 소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20절을 보면 압살롬이 아비도벨에게 반역이 성공한 시점에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비도벨은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21절)는 말을 합니다.

아비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한 것은 다윗이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남겨 둔 후궁들과 동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다윗의 미움을 사서 다윗과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고, 이것을 압살롬과 함께한 사람들이 알게 되면 더욱 힘을 내어 압살롬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기에 혹 압살롬이 다윗과 화해하게 되면 압살롬과 함께 반역에 동참한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비도벨의 모략은 압살롬의 왕권을 굳건히 세우는데 그 중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후궁 열 명을 남겨 놓은 것은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후궁 열 명을 남겨서 궁을 지키겠다는 다윗의 생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궁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면 연약한 여인에 불과한 후궁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모든 용사들을 남겨둠으로써 압살롬의 군대와 일전을 치르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고 궁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은 궁을 압살롬에게 빼앗기지 않을 생각으로 후궁을 남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후궁이란 연약한 여인을 남겨둔 것은 압살롬에 대해 힘으로 싸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힘을 위해 연약한 후궁과 동침하게 합니다. 이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하는 윤리적인 악함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위해 약자를 압제하는 악함인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힘써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힘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세상은 여호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피조물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선 인간은 누구나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약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신자이며, 이러한 신자가 약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세계는 약자의 세계입니다. 강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은혜로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교회는 이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고 교인 불리기에 힘을 쓰고, 선교나 구제 등의 모든 사업까지 교회의 명성을 위해 하는 것들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힘에는 사람이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 받고 높임 받으며 많은 사람이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한번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패가망신을 자초하면서까지 국회의원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힘의 맛을 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 맛에 심취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힘은 여호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인간의 패역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망하는 길일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인정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 연약한 후궁 열 명이 희생을 당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연약한 후궁과 같은 존재로 남겨지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압살롬처럼 반역을 해서라도 힘을 갖게 된 자로 남기를 원합니까?

연약한 자로 남겨지고 연약한 자로 산다는 것은 분명 고통이며, 자존심까지 무너지는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 길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연약함을 통해서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악함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얘기가 여러분에게 전혀 힘이 되지 않음을 잘 압니다. 힘없으면 무시 받고 업신여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의 구조 속에 살아야 하는 여러분들에게 힘이 아니라 약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분명 외면당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음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믿고 기도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세요. 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을 가지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며 복을 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귀를 솔깃하게 하고 그나마 마음에 조그만 희망이라도 갖게 할 수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여러분을 속이고 아비도벨과 같은 모략을 여러분께 가르칠 수 없기에 힘이 되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말이 힘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힘을 구하고 원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의 힘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단지 입술에서 흘러나는 고백이 아니라 그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배어져 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 되시는 주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는 고백과 함께 주 여호와께로만 달려갈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약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약자로 세상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추구하고 힘을 위해 산다면, 그리고 힘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그는 분명 신자라는 껍데기만을 들춰 입고 있을 뿐임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는 신자라 하나 예수님은 그를 모른다는 선언을 들을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여호와가 힘이라는 고백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능력한 것인가를 절감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의 삶을 생각하게 되면, 힘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분명 육체가 사는 데는 돈이 제일이고 권력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에 돈과 권력은 무용지물입니다. 착한 행위도 무용지물입니다. 착한 사람은 천국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항변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는 착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착함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역시 도덕의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즉 산상수훈을 수준 높은 도덕으로 이해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역할은 자신의 선함과 양심과 의미와 노력으로 말씀을 실천해 내고자 하는 사람과 양심대로 살았다고 자신했는데 말씀을 놓고 보니 내가 바로 날마다 말씀에 실패하며 살았던 죄인일 뿐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뿐이라는 고백을 하게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은 죄인으로 서게 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이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과 악함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이들에게 주의 도우심은 놀라운 힘과 능력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결국 세상에서 한번 폼나게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있는 자가 폼 잡을 때 약자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피 흘리는 악함입니다. 그래도 이러한 삶을 원하신다면 아예 지옥가기로 작정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시고 힘써 일하십시오. 그러면 혹 힘있는 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는 이름은 떼버리십시오, 신자라는 이름은 힘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신자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