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 사무엘하 16:1-4 시바의 속셈

<본문>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사무엘하 16:1-4)

<설교>

세상은 타인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 그 위기를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얻어낼 것인가를 궁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위기는 그의 문제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타인의 위기를 대해야 합니다. 타인이 어떤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 그 일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위기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1:1의 문제로만 봐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위기를 당하게 된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를 책망하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위기는 위기를 당한 본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위기를 당한 그 사람만을 향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묻는 것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고통의 문제를 소경된 그 사람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다만 소경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소경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즉 남의 처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는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어떠함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소경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아는 신자라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말씀하심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 하나하나가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되지 못할 때 그는 타인의 위기는 오직 그의 문제며 위기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뿐입니다.

성경은 사실 내 얘기라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아니고 나의 나라의 역사도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과거의 이야기이며 그것도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해 귀가 열려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해서만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타인이 겪는 문제나 어려움을 두고 이러저런 입방아를 찧기보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고,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시바라는 사람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의 사환이었으나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므비보셋의 집을 관리하도록 한 사람입니다(삼하 9:9,10). 그런 그가 나귀와 식량을 가지고 다윗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에게 다윗은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답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다윗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다시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되고 시바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아비의 나라, 즉 요나단의 나라를 되찾아 내게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의 나라는 그 아들 요나단의 나라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요나단의 나라는 아들인 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옳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나 시바의 이 말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삼하 19:24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떠난 후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맵시내지 않고 수엽을 깍지 않고 옷을 빨지 아니하고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거짓으로 므비보셋을 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을 모두 시바에게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바의 말만 듣고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 않고 행동한 다윗의 실수임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다윗이 도피하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단지 도피하는 도중에 종 하나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는 나귀와 양식을 받았을 뿐입니다. 왜 이런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까지 기록하여 놓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작은 일로 여겨지는 것이지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기에 사소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다윗처럼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삶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삶의 실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삶을 향한 관심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바램은 무엇일까요? 그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가령 사업을 할 때 관심은 자연 사업이 성공하는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성공에 관심을 두게 될 때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와서도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는 요구만을 쏟아 놓을 뿐이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과 문제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 19:21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계획한 바가 성취되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하고자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면 굳이 사람이 계획을 세울 이유가 있으며 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우릴 하여금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에서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피하고 있지만, ‘다윗이 어떻게 될까?’라는 결과보다는 다윗이 당하는 이러한 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위기는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할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타인을 내 앞에 세우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바는 다윗의 위기를 이용해 이득을 얻고자 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 나귀와 양식을 가져다주면 분명 다윗은 자신을 신임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므비보셋을 참소한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다윗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말씀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산다면 그 어떤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을 주시며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다만 그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를 원한다면 시바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속셈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위기는 다윗의 죄로 인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제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위기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 보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바는 오히려 다윗을 이용해서 자기 것을 챙기고자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함을 보이시는 일 앞에서 죄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항시 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으므로 죄를 쌓으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삶을 내어 놓고 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어떤 결과를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들었느냐를 날마다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