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강) 사무엘하 15:30-37 지혜 싸움

<본문>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라 저희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저희와 함께 거기 있나니 무릇 너희 듣는 것을 저희 편으로 내게 기별할지니라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사무엘하 15:30-37)

<설교>

지혜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지혜는 ‘어떤 문제를 풀어가고 해결하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을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지혜가 있다는 것은 말씀한 대로 어떤 문제나 상황에 대한 대처나 해결 방법들을 잘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관이 있으며, 신자가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도 관심이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기 위해 4년간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행했던 모든 방법들이 세상의 시각에서는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자만이 왕의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왕은 백성들을 사랑과 긍휼로써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즉 힘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연약한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연약한 자리에 있을 때 긍휼과 사랑이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이러한 왕의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오직 왕이라는 권력만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를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방법을 동원하여 왕위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무시한 채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순순히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의 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성과 백성이 해를 입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왕의 마음이며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다윗을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때로는 자신의 손해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일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지혜를 말하지만 신앙에서의 지혜는 내가 어떤 손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지혜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삶의 경험과 연륜과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에 지혜롭게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어떤 일을 할 때 ‘지혜롭게’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교회가 무슨 일에서든 지혜롭게 한다는 것도 그 의미는 외적으로 이득이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혜롭게 일한다는 것은 교회의 외적인 이득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지혜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지혜는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이스라엘 안에 대대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다윗을 택하시고 왕으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로 세우신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가르치라고 세우신 다윗이 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지혜가 실패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몸소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맛봄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갖게 되고 그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을 통해 증거되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아는 자에게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다윗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에 대해 무지함으로 오직 왕은 무상의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이런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압살롬의 어리석음은 결국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하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큰 슬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맨발로 울며 행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모습임을 생각해 볼 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범죄한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회개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의 지혜를 철저히 체험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그리고 우리아를 죽일 때만 해도 이러한 지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자신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느 권력자처럼 왕이라는 권력으로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 남편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으로 인해 죄를 알게 되고, 지금과 같은 고통의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할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이렇게 인도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다윗은 무엇이 어리석음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에게 비춰지는 어리석음은 무엇이겠습니까? 31절을 보면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 보면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서서 반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란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왕이라는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리석게 해달라는 것은 그것이 참된 지혜가 아님이 드러나게 해달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시대에는 다윗을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능력있고 지도력을 갖춘 사람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해 사랑과 자비하심을 증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기 위한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오늘날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고전 1:24 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들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한 일이지만 인간의 악함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참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만 산다는 것이 현실과 맞지 않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지혜 싸움인 것입니다. 누구의 머리가 좋아서 이기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고,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냐를 기준한 싸움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이러한 싸움 자체를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싸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기도에 의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후새를 만나게 하십니다(32절). 그리고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압살롬에게 투항한 것처럼 꾸며서 궁중에서 무엇을 듣거든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면 다윗은 그들에게 기별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일을 꾸미는 것은 왕위를 찾기 위한 계략이 아니라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계략과 뜻은 하나님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인간의 계략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굳게 세우기 위해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아히도벨의 모략으로 살아갑니다. 빼앗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의 권력과 부를 얻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며 자신의 모략을 앞세워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 신자가 놓여 있습니다.

과연 신자는 세상에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다윗처럼 세상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구하며 살아가야 함니다. 나를 이기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뛰어난 것임을 증거 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과연 그러한 삶입니까? 어쩌면 우리 역시 아히도벨의 모략에 마음을 같이 하며 그들의 모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것이 아히도벨의 모략과 같음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증거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먼저 신자가 십자가의 도의 깊은 맛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십자가의 도의 맛을 모르면서 어찌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깊이 깨닫고 회개하는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드러나는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 실패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발견하고 그러한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18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죽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큰 능력인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이것을 마음 깊이 절감하느냐는 것입니다. 절감하신다면 세상을 세상의 지혜로 살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이 선이고, 내가 잘되는 방법이 지혜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길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절감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 사랑과 긍휼에 감사하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시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말미암아 복을 얻고 구원을 얻겠다고 하는 것도 아히도벨의 모략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어리석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결국 신자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구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의 도에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지혜 있게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되면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 즉 교회를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하면 내 교회, 이 교회를 부흥시키고 발전시킬까?’라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교회 성장을 위한 아히도벨의 모략일 뿐입니다.

신자는 싸우는 자입니다. 자신을 위한 모략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한 것이지만 신자에게는 최고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