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2:8-17 두 세력

<본문>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 세며 두 해 동안 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더라 넬의 아들 아브넬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복들은 마하나임에서 나와서 기브온에 이르고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헬갓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설교>

인간에게 있어서 힘은 항상 강한 유혹으로 존재합니다. 힘없는 나약한 존재로 사는 것보다는 강한 자로 존재함으로써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누르는 것에서 쾌감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본래 성품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성품으로 살아가게 된 배경에는 선악과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공짜로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 ‘자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가 없기 때문에 힘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힘은 소유에서 나옵니다. 소유한 자는 강한 자로 존재하게 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무능하고 약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입니다.

교회가 큰 교회 작은 교회로 인식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교회는 단지 교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는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하여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를 세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는 교회가 교회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 작은 교회로 분리되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본성의 바탕에는 소유, 즉 건물과 숫자 등을 기준으로 하여 크고 작음으로 구분하는 의식이 깔려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물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듯, 교회 역시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습니다. 목사의 소유도 장로의 소유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모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어느 곳에서는 많이 모이고 어느 곳에서는 적게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이 모이는 것을 자신들의 공로로 여깁니다. 우리가 전도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적은 교회에 대해서는 자신들보다 무능한 교회로 여기고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게 하시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을 그 나무를 보면서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등장하여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뭔가 되보고자 하는 포부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악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포부와 야심들이 서로 부딪히는 현장입니다. 인간의 포부와 야심이 서로 충돌함으로써 싸움이 끊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서로가 더 큰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내가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누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 속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투쟁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하고 실패하는 약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조용히 십자가에 죽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몸담고 있는 존재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여기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셨고 어떤 모습을 보이셨고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우리의 모든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애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라고 이름 하는 우리들에게서도 세상처럼 힘을 추구하고 싸우고 투쟁하는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유다 족속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8,9절을 보면 아브넬이란 사람이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족속의 왕으로 세웁니다. 결국 같은 민족들 안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존심과 명예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에서든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공부를 못하는데 내가 잘 아는 다른 사람의 자식이 공부를 잘할 때 괜히 자기 자식을 향해 화가 나기도 합니다. ‘너 때문에 내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봉사를 할 때도 자칫 경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경쟁과 싸움이며 시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이러한 본성으로 살아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본성이 십자가 아래 다스려져야 마땅한데 정작 우리 자신은 우리의 악함을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악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나의 잘함이 곧 신앙인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좋은 신앙을 스스로 만들어 냄으로서 남들보다 나아 보이고 우뚝 서기 위해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내에 두 왕이 발생하고 두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어느 왕국을 인정하시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함을 보고 인정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택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악함과 못남을 보지 않으시고 부르셨음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택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감사함과 은혜와 자비를 보고 모이는 신자라면 세력 다툼과 경쟁은 없을 것입니다.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없기 때문이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신복들과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이 길르앗을 못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됩니다(12,13절). 그리고 아브넬이 요압에게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라고 제안을 하게 되고 이것을 요압이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서 양쪽에서 열 둘씩 등장하여 각기 적의 머리를 잡고 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이는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고 결국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패하게 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아브넬은 왜 이러한 제안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아마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쪽은 겨우 유다 한 지파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이 왕이 된 쪽은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입니다. 세력으로 계산하자면 이스보셋 쪽이 월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은 처음부터 다윗 편을 무시했을 수 있고, 결국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한 제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힘의 과시는 결국 큰 싸움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는 본문의 이런 내용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나의 본심이 본문에 그대로 묻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서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힘의 대결이고 힘으로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의 구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들이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서도 힘으로 인한 경쟁과 파당과 싸움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쉽게 보여지는 대표적인 파당은 목사와 장로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옹호하는 세력과 장로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구축되어 파당으로 형성되게 되고 결국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견제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석교회라고 해서 절대 예외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한 파당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눈으로 보여지는 싸움이 아직 없을 뿐이지 서로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어울려서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싸움과 파당으로 갈 소질을 갖고 있는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며 약자로 오신 예수님 바라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결코 파당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바리새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을 모을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을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세력도 갖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또한 때릴 때 그냥 맞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한마디로 무능하고 쓸모없는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분을 영접하고 믿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가지 않으면서 주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피의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믿음의 본질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 어떤 세력도 존재할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세력이 존재한다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세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세력도 용납하고, 지고, 양보하는 자로서의 세력일 뿐입니다. 이점을 잊어버린다면 참된 교회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 세력은 누가 더 강한가를 두고 겨루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왕국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힘이 더 센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난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을 비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경쟁의 도구로 삼거나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되고자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신다면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도구가 되어서 타인을 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됨을 아셔야 합니다.

저 사람보다 잘해 보겠다는 것도 상대방을 이기겠다는 투쟁 의식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만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힘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상의 세력에 의해 죽으셨음을 생각한다면, 힘있는 자로 교회에 존재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을 해하는 것임을 안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사셨는가를 돌아본다면 힘있는 자로 살기보다는 믿음이 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모습이고 이러한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 천국의 모습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은석교회에서는 과연 이러한 천국의 모습이 보여 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