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강) 사무엘하 15:13-18 다윗의 도피

<본문>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의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하더라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머무니 모든 신복이 그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육백 인이 왕의 앞으로 진행하니라(사무엘하 15:13-18)

<설교>

일반적으로 어느 국가라 할지라도 반역의 사건이 발생하면 치열한 전투와 피흘림이 예상되기 마련입니다. 순순히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반역자에게 내어줄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자신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서 반역자에게 맞서 대항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전혀 예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갔다고 해서 다윗의 모든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18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신복이 다윗을 따랐고 가드에서 온 육백 명의 사람도 다윗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압살롬과 맞서 싸워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다윗은 어릴 적 골리앗을 죽이기도 했고 사울의 칼과 창을 피해 도망 다니며 단련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14절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고 말하는 이것이 반역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은 아마 다윗을 용맹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용맹은 커녕 약해빠진 인간의 모습만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서의 모든 체면과 권위를 상실해 버린 다윗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압살롬에게 죽을 것이 두려워 겁을 잔뜩 먹고 허겁지겁 도망을 치는 다윗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본문의 다윗은 무능한 지도자의 모습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따르는 가드에서 온 육백 명의 사람을 돌아가라고 지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압살롬의 힘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도망을 친 것이라면 어떻게든 많은 사람이 자신을 지켜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힘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힘을 가짐으로써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힘을 보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압살롬의 힘이 두려워서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24절에서 사독과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서 메어 나왔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궤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상징이었기 때문에 언약궤 없이는 이스라엘의 존재성 자체가 무너질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로 성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즉 압살롬의 수중으로 보낸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어쨌든 압살롬이 왕이라는 증표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사극에서 역모를 꾀하고 왕위를 빼앗은 사람들을 보면 가장 먼저 옥쇄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의 상징물인 옥쇄를 확보하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다윗이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것은 스스로 왕 됨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언약궤를 확보하고자 하지 않았을까요? 그나마 언약궤가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언약궤를 압살롬이 점령한 성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다윗은 단지 압살롬이 두려워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두려운 것도 아닌데 왜 도망을 치는 것입니까? 두렵지가 않다면 도망을 칠 것이 아니라 군사를 모아서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아마 우리의 생각이며 의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인가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태도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가질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계 13:10절을 보면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은 위의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이나 계시록의 말씀은 힘에 대해 힘으로 대항하는 자는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힘에 대해 힘으로 대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힘에 대해서는 힘으로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생각입니다. 우리 몸은 이미 힘에 대해서는 힘으로 대항하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지는 것을 선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선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것이 복이며 지는 것은 패배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이기는 분이 아니라 지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대항할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붙들 때 붙들리시고 때릴 때 맞으시고 못 박을 때 박히시며 예수님의 예수님 됨을 만천하에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면 자신을 붙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는 자들을 보복하며 보란 듯이 승리자로 나타나셔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에 의해 죽으심으로써 세상의 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면 도망을 칠 것이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을 평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곧 칼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와 같은 성정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도망을 치는 것입니까? 왜 스스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전락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14절 뒷부분의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는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죽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자신을 따르는 신복들과 성이 해로움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압살롬과 다윗의 다른 마음인 것입니다.

압살롬은 어떻게든 왕위만 빼앗으면 되었습니다. 목적이 왕위를 빼앗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군가가 죽고 성이 많은 피해를 입어도 괘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으로 인해 성이 해를 입고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왕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목적의 차이이며 사고방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에서 이 차이를 드러내고 있고, 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이 차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자는 떡으로,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힘이 되지 않는 믿음으로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길이 정당하고 또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길임을 믿고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부싸움에서조차 상대방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힘이 없어서 질 때는 비록 지지만 속으로는 분노하고 복수의 기회를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지는 자로 오셔서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것이 아닌 지는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십니다. 과연 지는 삶을 배우고자 하십니까?

오늘날 교회도 보면 이기기 위해 기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분란이 발생하고 패가 나뉘어 질 때 서로 이기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 6:7절에서는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말을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말에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불의를 당하고 속는다는 것은 손해를 입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가 피차 송사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손해를 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과연 이 길을 가고자 하십니까?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대해 도피하는 것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를 빼앗긴다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이 왕위를 놓고 분쟁할 수 없다는 생각일 수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백성과 성을 보호하기 위해 불의를 당하는 길을 가고자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16절의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모든 신복을 데리고 도피를 하면서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합니다. 후궁이라면 여자입니다. 여자 열 명이 무슨 힘으로 궁을 지킨단 말입니까? 다윗이 이것을 모르진 않을 것입니다.

후궁은 왕의 후처입니다. 그러한 후궁을 남겨두어 궁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궁을 압살롬으로부터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궁의 주인이며 왕이라는 것을 압살롬에게 보이기 위해서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후궁 열 명을 남겨 둠으로써 다윗은 힘으로 싸우는 것을 포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하나님의 예언(12:11)대로 다윗의 후궁과 동침함으로써 왕된 자신의 힘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압살롬과 다윗은 생각하는 바가 달랐습니다. 얻고자 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오직 왕의 자리를 탐냈을 뿐입니다. 힘을 원한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스스로 불의를 당하는 길을 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도피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길은 압살롬과 같은 생각과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길을 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열 명의 후궁들이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궁의 주인은 다윗이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신자는 어쩌면 남겨진 열 명의 후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궁을 위해서, 다윗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곧 우리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세상에 남겨진 것이 곧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볼 때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를 세상에 남기신 것은 우리의 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것을 증거 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의로 인해 고통을 받아도 말입니다.

약자로 오셔서 온갖 불의를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길에서 신자의 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자가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이 신자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의 길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께 잘만 보이면 복을 마구 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신자의 길은 약자의 길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바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