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강) 사무엘하 15:7-12 백성의 어리석음

<본문>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고하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저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제사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사무엘하 15:7-12)

<설교>

지난 시간에는 반역을 위한 준비 작업에 철저했던 압살롬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압살롬은 반역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부지런함을 보였고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듣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압살롬이 백성들 편에 있음을 주지케 하였고 자신은 공의로 재판을 하는 사람임을 부각시켰으며 겸손과 사랑의 모습까지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압살롬의 행위를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으로 평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을 뿐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의 것이며, 또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압살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목사나 신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압살롬이 드디어 반역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 깁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서원을 했으니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거짓된 청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압살롬의 청을 허락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말하고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압살롬의 말에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압살롬의 마음을 좋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다윗을 속인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서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두루 보냅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에게 지시하기를 나팔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사 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고 실제 압살롬은 반역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13절에서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같은 반역은 이방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왕이 폭군이어서 견디다 못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고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반역은 현대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일들을 다들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 모두의 중심에는 최고 지도자라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실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반역을 사회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 역시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탐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존재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반역은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노려다는 도덕적인 비난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의 반역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일단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구출된 민족들이기에 그들의 바탕에는 ‘희생의 피’라고 하는 은혜가 깔려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은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계속 물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피의 은혜를 잊었을 때는 이미 이스라엘다움을 잊어버린 것이고, 이스라엘 내에서 누구라 할지라도 피의 은혜를 잊는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왕을 선택하시고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합니다. 그가 권력을 탐했든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반역을 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기억했다면 다윗 역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왕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다윗에게 반역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망각하고 있던 압살롬에게는 이미 하나님이라는 존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면 ‘내 욕망을 포기한 채 산다면 내 인생은 뭐냐?’라는 반발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비록 은혜를 언급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차원에서의 은혜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은혜를 언급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은혜인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를 잊지 않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것을 말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은혜를 감사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이 성사되는 것을 은혜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완벽한 은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위치를 잊어버림으로서 교회 자체의 욕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여 정당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존재하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11-12절을 보면 “그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아무 뜻도 없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을 따르게 됩니다. 어쨌든 그도 다윗보다는 압살롬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압살롬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압살롬을 신뢰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참여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수준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압살롬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압살롬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의도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압살롬은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의도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로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반역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압살롬을 신뢰하였기에 압살롬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말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은혜를 말하되 은혜가 아닌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은혜라는 말만 강조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결국 그 사기(事機)를 알지 못한 채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을 나와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과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목사라고 해서 그의 말을 무작정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인품이라는 것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착한 일에 대해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품이나 착한 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바른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즉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복음을 알았다는 증거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품이나 착한 일 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비난 받을 인품을 가져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있다면 과연 그에게서 보이는 겉모습이나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라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윤리입니다. 은혜를 알기에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약자라고 해서 업신여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서 살펴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큰 예배당을 짓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말하면서 교회를 성장과 예배당 건축 등을 언급한다면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도 모른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복음이 아닌 길로 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살피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압살롬이 악한자입니까? 선한자입니까? 분명 악한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무작정 그를 따르는 것입니까? 그들 눈에는 압살롬은 왕의 자격이 있는 위대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선함과 그 행위로 인해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의 악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수준에 머무를까 염려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일에 도움을 얻고 있을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에게 허물이 있을 때 그 허물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숫자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교회의 재정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누가 복음을 전하든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에 두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를 살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옳고 그름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께 행함을 강조하고 요구한다면 그의 의도를 의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탐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인품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목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실까요? 바로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제가 은혜를 말할 때마다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은혜다’라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모른 바가 아니니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은 살고 애굽의 군사는 죽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신 덕분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다음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은혜를 잘 아니까 다른 일을 맡기신 적이 있던가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은혜를 잘 안다고 해서 마치 은혜를 완벽히 깨닫고 은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압살롬처럼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는 잘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악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고마움도 잊어버린 채 나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고 그런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모이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뜻도 생각도 없이 그런 말에 동조하고 따르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신자의 위치에 굳건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