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강) 사무엘하 15:1-6 압살롬의 도적질

<본문>

이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압살롬이 일찌기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사무엘하 15:1-6)

<설교>

요압을 이용하여 다윗과 거짓으로 화친한 척 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준비한 것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역을 하여 왕이 된들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것은 송사가 있어서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수완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보면 먼저 압살롬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틀렸다고 반박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마치 그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를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압살롬은 먼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한 것이 옳고 바르다고 함으로써 압살롬이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현재 다윗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네가 옳다고 해도 지금의 왕은 너의 옳음을 들어주지를 않을 것이라는 말로써 다윗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절)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만이 백성들 편에 서서 모든 송사를 공정하고 바르게 판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각 시킨 것입니다.

이같은 압살롬의 수완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그는 백성들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로 행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처럼 압살롬은 사람들 앞에서 왕자라는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신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정서는 도덕적이고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정치인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이 압살롬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겸손의 행위에 대해 속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북종 할 뿐입니다’는 마음이 겸손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감히 자신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나올 수 없는 죄를 범한 처지면서도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요압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절을 하는 것을 막으며 그들의 입을 맞추는 것은 백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의 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왕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맞춰 환대하는 압살롬이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그것이 압살롬을 신뢰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보다는 그러한 압살롬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한 압살롬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겸손과 자신들을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압살롬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무엇에서 크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겸손을 가장한 것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하는데, 왜 마음을 도적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도적했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여부는 결국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또한 홍해라고 하는 죽음에서도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노래하면서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 까지였나이다”(출 15:16)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셨기 때문임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피로써 살려낸 민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고전 7: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든 우리이든 마음은 나도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들을 다스리고 권면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뺏고자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살롬이 잘못됨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압살롬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둔 채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한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같은 수완은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힘있는 목사로 군림하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마치 교인들의 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한 겸손을 가장하여 행동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하고,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사의 본분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할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신자입니다.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도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를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뢰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돕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린양의 피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를 향해야 합니다. 이 일을 돕는 자가 곧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을 돕는 것인가를 모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를 원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