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 사무엘하 14:28-33 죄인이라면

<본문>

압살롬이 이태 동안을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르되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압살롬이 그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와서 압살롬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놓았느냐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네게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다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사무엘하 14:28-33)

<설교>

지금까지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말에 대해 수없이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기 위해 죄를 언급하기는 해도 사실 ‘죄인’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왠지 피하려고 하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죄를 말한다면 죄의 본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 즉 죄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것이며, 분명 그것이 신자로서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로 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춤으로서 자신의 의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인 됨을 아는데 너는 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는 식으로 죄인임을 안다는 것을 자신의 정당성을 꾀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곧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다는 의미가 되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에 따른 행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인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인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인다면 그가 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압살롬이 다윗을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28-29절을 보면 “압살롬이 이태 동안을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르되 오지 아니하고 또다시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압살롬이 왕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한 것이나, 돌아오게 하였으면서도 그 얼굴을 보지 아니한 것이 자식에 대한 어떤 갈등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죄로 인해 다윗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즉 다윗이 자신을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범한 죄를 생각하면 감히 다윗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압살롬은 죄를 범한 죄인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있으며 죄인이라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말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죄를 알고 있으며 자신의 죄인 됨을 진심으로 보는 자로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압살롬이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다면 다윗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죄인 됨을 안다면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임을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임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죄인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그는 자신에 대해 그 무엇도 하나님께 나갈 조건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소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하면서 그것을 의로 삼아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을 과연 자신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죄인 됨을 안다면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께 내어놓을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덮어주고 가볍게 해 줄만한 것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이 의인이라고 칭송을 할 만한 일을 행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아는 신자에게서는 결코 자기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타인의 신앙에 대해 자기 멋대로 판단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인데 죄인인 주제에 누구를 판단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알기에 남을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됨을 아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요압이 오지 않자 압살롬은 술수를 부립니다. 30-31절의 “압살롬이 그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와서 압살롬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놓았느냐”는 구절을 보면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놓아 요압이 압살롬을 찾아오도록 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윗을 만나겠다는 압살롬의 고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압살롬은 왜 이토록 다윗을 만나고자 할까요?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반역을 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다윗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득을 위해 다윗을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도 하고, 그것도 단순한 기도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여겼는지 기도원이라는 곳에 파묻혀서 40일 금식기도라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죄인이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죄인임을 모르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제일가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외모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이라는 본질 앞에서 인간의 모든 면과 조건이 무너짐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조건을 가졌다 할지라도 멸망의 대상인 죄인이라는 선언 앞에서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인물 조건, 선행으로 죄인이라는 선언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인이십니까? 진심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보신다면 ‘죄인이라면 어떻게 사는가?’라는 생각을 깊이 해보시기 바랍니다. ’죄인다운 모습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은총을 속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자랑이 있고 자기 의를 높이고 판단과 비판이 있으면서 자신의 죄를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은총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안다고 한 그 모든 것은 나의 속 심령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은혜만 말하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죄인임을 열심히 외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말한다고 해서 자신을 신자로 여기기보다는 죄인이면 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필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는 아들의 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러한 은총을 입었습니다. 신자는 이 은총을 증거하고 자랑하고 선포할 존재인 것이지 누군가를 판단할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곧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음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었다고 하면서도 긍휼이 없는 자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죄인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인에게 베풀어진 은총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인답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3절을 보면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고 말합니다. 다윗과 입을 맞추는 압살롬은 속에 반역을 품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죄를 생각했다면 다윗의 입맞춤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부르시고 입을 맞춰주는 것에 대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본다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입맞춤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며 하나님의 입맞춤 앞에 있으면서 그 속에 자신을 위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를 말하되 그 속에 예수님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는 신자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그 마음은 예수님에게로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예수님의 은총이 아니면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멸망의 존재임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참으로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죄에서 건져내고 해방시켜주고 자유를 얻게 할 능력이 없음을 알기에 세상의 것도 무가치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런 신자가 세상의 조건, 외모를 내세워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로서 군림하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아는가를 보려거든 죄인답게 사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입게 된 예수님의 은총을 아십니까? 내가 은총을 아는가를 보려거든 죄인답게 사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