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 사무엘하 14:21-27 압살롬의 귀향

<본문>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받은 줄을 오늘날 아나이다 하고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사무엘하 14:21-27)

<설교>

지난주에는 요압이 여인을 내세워서 살인한 아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함으로 말미암아 도피 중에 있는 압살롬을 돌아오게 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부모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의 역할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대로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왕은 하나님의 규례를 굳게 세우는 다스림을 펼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에 하나 다스림에 있어 인간적인 마음이 앞서게 되면 인간의 정은 부각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감추어지게 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 부분에 대해 실패했고, 그것이 압살롬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 것입니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하나님 앞에 불의를 행한 자로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식’이란 관계로 대한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호소는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극히 인간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잘못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한가지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다윗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인이 다윗에게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라고 권유하는 이것이야 말로 죄인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에 대한 어떠한 처리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되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한 분명한 처리로서 예수님을 내세우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대할 수가 있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란 인간의 본성과 마음과 감정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굳건한 토대로 되어있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여인을 보낸 자가 요압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소년 압살롬을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지시대로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24절에 나옵니다.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는 내용에서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해가 안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13:39절을 보면 압살롬이 그술로 도망한지 3년이 흘렀을 때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간절하였다고 말합니다. 간절하였다는 것은 그리워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자식에 대한 그리움에 다윗의 애가 탔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요압 역시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그리움을 눈치 채고 여인을 보내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만큼 압살롬이 돌아오면 크게 환영하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24절에서 다윗은 압살롬의 얼굴을 자신에게 보이지 말게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입니다. 만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워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돌아오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막상 돌아오자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는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떤 분은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는 다윗을 통해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고 화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씀하고자 하신다면 다윗이 압살롬을 외면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윗이 압살롬을 크게 환영을 해서 일단 겉으로는 죄인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돌아오게는 하되 만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돌아오게는 하시되 만나지는 않는다는 말이 타당하겠습니까?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은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나중에 죽게 됩니다. 죄인을 돌아오게 하셨다가 다시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진대 이런 면에서도 본문은 무작정 죄를 용서하고 돌아오게 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면서도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압살롬을 간절히 그리워했으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자식과 불의를 사이에 두고 다윗의 마음이 갈팡질팡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압살롬의 죄도 외면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압살롬이란 자식에 대한 그리움도 끊어버리지 못한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면서도 그 얼굴을 보지 않는 어정쩡함으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머리로는 무엇이 의로움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를 알고 있지만 그 행동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 대해 하나님의 규례를 중심으로 단호한 행동을 보이지 못한 것은 압살롬의 인물됨이 한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5-27절의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는 구절을 보면 압살롬의 인물됨이 어떠했는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압살롬을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을 외모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미남이라는 얘기입니다.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성경이 왜 갑자기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할까요? 저는 그것을 다윗의 갈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보지 않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도 압살롬이 행한 죄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압살롬이 범죄한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압살롬의 범죄를 염두에 두었다면 범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알고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있는 바로 그대로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갈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에 대해 갈등하게 한 원인이 바로 압살롬의 외모의 뛰어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둔 부모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의 기본적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자식이 뛰어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TV를 볼 때 공부를 잘해서 뉴스에 나오거나, 아니면 인물이 좋아서 탤런트를 하며 유명해진 사람을 보거나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혹 ‘저런 자식을 둔 부모는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저런 자식에 비해 나의 자식은 별 볼일 없이 여겨질 때 불행하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없습니까?

압살롬이 만약 뛰어나지도 않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면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런 점에서 제가 생각할 때는 압살롬의 인물됨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뛰어난 자식둔 부모의 갈등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인물의 뛰어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외적으로 흠이 없는 굉장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죽어야 할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홀히 하기에 자식이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부모는 자식을 부모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에는 필히 부모의 욕망이 실리지 않습니까? 이처럼 부모의 욕망이 자식에 대해 헛되고 쓸데없는 꿈과 망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간절히 그리워 한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의 자식이라는 면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다윗은 자식의 뛰어남에 마음이 끌렸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자식을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징벌한다는 것도 무척 망설여지는 일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뛰어난 압살롬이 결국 다윗에게 반역을 합니다. 범죄한 자식에게 하나님의 규례를 굳게 세우지 못하고 자식의 뛰어남에 마음을 뺏긴 다윗이 결국 그 자식으로 인해 어떤 일을 겪게 되는가를 통해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식이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누구나 자식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자식의 성공으로 행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성공한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고 소홀히 해도 ‘내 자식은 이러한 사람이다’는 것으로 자식의 잘못을 덮어 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로서 크게 잘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자식의 영혼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신앙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소홀히 해 버리고 오직 자식의 성공만을 기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부모 스스로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들 속에 세상에서 뛰어난 존재 되는 것을 사모하는 본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과 마음에서는 자식이 세상에서 비록 알아주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 분명히 자리하지만 실제 이끌리는 것은 자식의 성공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뛰어난 인물의 압살롬에게 마음이 이끌리듯이 우리 역시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쪽으로 마음이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성공하는 길이라면 신앙을 외면해도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른 자가 되도 좋으니 성공만 하라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아는 길로 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있으나 정작 말씀에 이끌려 가기보다는 다른 것에 이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갈등입니다. 심지어는 참된 믿음으로 사도로 여기는 사도 바울도 이런 문제로 크게 애통해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롬 7:21-24절을 보면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고백을 하며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기 속에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하며 그 세력에 이끌려 가는 자신을 두고 고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은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택한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압살롬의 죄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를 분명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갈등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여러분 역시 수없이 많은 경우 ‘이러면 안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데’라고 하면서 정작 행하는 것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르게 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고 은혜를 따라 살기보다는 세상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인간은 연약하니까 그냥 포기하고 내 마음이 끌려 가는대로 마음껏 살면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연약함을 죄의 정당성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처럼 하지 말라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처럼 하지 말라고 하고, 또 우리 스스로 ‘다윗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는 각오와 다짐을 수없이 반복하며 굳게 세운다고 해도 조금만 정친 차려 나를 보면 어느새 세상에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도 자신의 고민을 평생 스스로 극복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이끄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자기 속에 다른 법이 있어 자신을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면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규례보다 자식의 뛰어남에 더 마음이 끌리는 다윗이야 말로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자식에 대해서는 다윗의 마음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자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범죄한 자라면 결국 멸망의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자식이 내 앞에만 서면 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그러한 존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생각과는 달리 세상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면 예전에 벌써 하나님을 외면했어야 마땅한데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이 있고 아들의 죽으심에 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람과 세상에 의해 변하고 항상 갈등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절대 불변입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분이라고 일컫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나는 연약하나 강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다윗도 연약한 자였으나 다윗에게 하신 언약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연약함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연약함에서 모든 소원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것이 연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