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강) 사무엘하 14:1-11 여인의 호소

<본문>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주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죽인지라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 두지 아니하겠나이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왕이 가로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저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14:1-11)

<설교>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행한 자는, 또는 이렇게 하지 않은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 진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사고방식에서 멀어진 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민족성과 혈통으로 뭉친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고방식이 서로 일치되어 하나된 특이한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다운 사고방식을 지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이나, 인간의 혈통의 관계를 뛰어 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사고방식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다스리고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국가와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다움을 무너뜨리는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철저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계에는 부모 자식, 친족이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초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죄를 범한 자식에 대한 다윗의 태도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암논에 대한 다윗의 태도나 압살롬에 대한 태도는 분명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형제를 죽인 압살롬에 대해 3년이 지나자 그 마음이 간절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보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이 더 앞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는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살인자에 대한 단순한 징계 차원의 규례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어느 누구의 생명도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생명을 감히 누가 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다운 정신이 아니기에 끊쳐 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살 수 있는 길은 도피성으로 피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도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고의성이 전혀 없는, 즉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경우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반드시 죽어야 하는 범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시행을 해야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이 온 배성들에게 선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식에 대한 마음은 다윗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을진대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자식의 죄를 처리한다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의 규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식에 대한 정만 앞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세워지고 무엇이 무너져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은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갈등과 고민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인간의 정과 관계만 세워지는 것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 마음을 요압이 눈치 챕니다. 그런데 요압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돌아오도록 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등장시켜서 다윗 앞에서 말할 내용을 가르쳐 주고 연기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한 말은 이러합니다. 자신은 남편이 죽고 아들 둘만 데리고 홀로 사는 참 과부인데, 이 아들들이 들에 나갔다가 서로 싸우게 되었고 말려줄 사람이 없어서 결국 형이 동생을 죽였는데 온 족속이 일어나서 동생을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야 하니 형을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남편의 두 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어 대가 끊어지게 됨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호소에 대해 다윗은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8절)는 말을 합니다. 여인은 다윗의 말에 대해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비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9절)는 말을 합니다. 여인이 말하는 죄는 살인한 자를 하나님의 규례대로 처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를 의미합니다. 즉 다윗이 자신의 호소를 들어서 동생을 죽인 형을 죽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면 그것은 곧 살인자에 대한 규례를 무시하는 허물이 되지만 그것은 모두 부모의 죄니까 왕에게 그 죄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여인이 다윗에게 하는 말은 요압이 미리 가르쳐준 것입니다. 따라서 9절의 내용도 요압이 가르쳐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압은 왜 여인을 내세워서 다윗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어쩌면 요압은 다윗은 하나님의 규례를 세워야 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압살롬을 그리워 하지만 선뜻 돌아오도록 하지 못하는 고충을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 모든 일을 이스라엘의 왕의 위치에서 바라보지 말고 부모의 심정에서 처리하라는 암시적인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인이 호소한 내용과 지금 다윗의 입장이 같습니다. 그래서 여인의 호소가 마음에 와 닿았는지 “왕이 가로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저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10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11절의 “여인이 가로되 청컨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로서 다윗의 굳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처리가 과연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인의 말을 들으면 그 처지가 아주 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규례대로 한다면 결국 여인의 말대로 그 후사가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인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의 규례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에서 다윗은 인간의 정리를 선택합니다. 인정상 비록 살인죄를 지었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 앞범죄한 살인자를 지키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규례 자체를 반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처사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결국 자신을 보낸 요압의 속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13-14절을 보면 “여인이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도모를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셨으니 왕께서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심은 그 내어 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아니 하심이니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으로 요압의 의사가 다윗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다윗은 그 말로서 여인이 요압이 보낸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여인의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인의 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인은 살인죄를 지은 자신의 아들을 지켜주겠다는 말을 들어서 왕은 왜 아들을 돌아오게 하지 않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큰 함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말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사랑과 자비하심을 근거 삼아 무조건 덮어주고 용서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덮어줘야 하고 넘어가고 받아줘야 하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을 내세워서 다윗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을 돌아오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어떻습니까? 이것이 맞는 말처럼 들립니까? 사랑, 자비, 용서, 분명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무작정 모든 죄를 덮어 버리는 식으로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베푸신 사랑이고 용서라는 뜻이지 모든 것을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식의 사랑이나 용서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용서는 무장적 봐주기 식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우리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을 내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을 보지 않고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고 미덕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지적하고 자신의 죄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무작정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대신 받으신 분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용서를 보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없는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해 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죄를 보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이 점을 잊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열심을 강조하며 교회에 득이 된다면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어떤 죄도 다 덮어지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죄도 봐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봐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 값을 아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인을 내세워서 압살롬을 돌아오도록 다윗을 부추기는 요압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여인의 말에 대해 아들을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다윗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 마지막 결과가 세상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작정 심판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심판을 이미 받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받으신 심판을 보시고 우리의 심판을 넘어가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마음이 좋은 분이어서 죄도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작정 봐주는 것은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들을 죽이시는 아픔과 희생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어떤 해로움도 입지 않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그러한 식의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나를 죽이지 않는 신을 원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모두 죽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나 대신 죽으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린 그분의 죽음 앞에서 죄의 심판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죄를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