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강) 사무엘하 13:34-39 무너진 다윗 가문

<본문>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소년이 눈을 들어 보니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더라

요나답이 왕께 고하되 왕자들이 오나이다 종의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대성 통곡하니 왕과 그 모든 신복도 심히 통곡하니라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니라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 지 삼 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사무엘하 13:34-39)

<설교>

본문을 보면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은 다윗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술 왕 암미홀의 아들 달매에게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면하고 돌아온 왕자들이 대성통곡을 하니 왕과 신하들도 심히 통곡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13장에서 살펴 본대로 비록 이복형제이지만 오라비인 암논이 다말을 범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말은 처량한 신세가 되어 친 오라비인 압살롬의 집에 거하게 되고 압살롬은 복수를 품고 살다가 기회가 되어 결국 암논을 죽이고 도망을 치는 형편이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윗의 집안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내보일 수도 없는 수치스런 사건들이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게 그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삼하 12:10). 하나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어 다말의 사건과 암논이 죽은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6:22절에 보면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공개적으로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나단의 추궁에 의해 죄를 깨닫게 된 다윗이 죄를 범한 것에 대해 고백하게 되고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왕 죄를 사하셨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왜 다윗의 집안이 엉망이 되는 큰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까? 단지 죄에 대한 보복과 징계의 차원에서라면 죄를 사하시는 것과 죄에 대해 징계하시고 보복하시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즉 죄는 사하였지만 죄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일이 있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다윗이 회개하기 전에 선포하신 말씀이어서 취소할 수 없기에 그대로 시행하시는 것입니까?

현대인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죄에 대해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죄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잘못을 범하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오게 될 결과를 완전히 예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죄로 인한 결과를 지금 목도할 수 있다면 죄를 범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죄를 바라보십니까? 어쩌면 정직하게 말해서 ‘사망’이라는 것에 대해 그저 막연히 두려운 것이라는 생각만 희미하게 가지고 있을 뿐 사실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죄에 대해 가볍게 여겨버리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것에 대해 회개를 하였으나 다윗은 아직 죄의 무서움을 목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만 ‘범죄 하였다’는 것에 대한 애통과 뉘우침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삼하 12:11-12)고 말씀하신 것을 들으면서도 다윗은 죄의 결과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집에서 수치스런 일들과 살인이 발생하여 아들이 죽고 도망치는 일들을 통해 죄의 무서움을 목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 볼 때 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희박하다는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너무 쉽게 가볍게 본다는 것이지요. 죄가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버리는가에 대해 생각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셨으면서도 굳이 말씀한 대로 다윗의 집안에 재화가 있게 하시는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가 참으로 무거운 것임을 보게 하기 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 집안의 재화는 우리가 죄를 범하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진 다윗 집안의 재화를 보면서 ‘나도 죄를 범하면 징계를 받는가?’라는 염려를 하기보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과 징계가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깊이를 더욱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징계가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죄의 무서움을 보면서 그러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아니 신자라면 죄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혹 예수님의 용서를 믿고 마음 놓고 죄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용서를 이용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이며, 진심으로 예수님의 용서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말은 암논에 의해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음으로서 더 큰 수치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다말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풀어줄 사람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의 다말의 수치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둔 것 같지가 않습니다.

13:21절을 보면 다윗은 암논이 다말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노했다는 것으로 그칠 뿐, 노한 다음의 다윗의 조치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냥 노하고 만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왜 그랬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어나게 하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다윗의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결국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윗이 평소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자신의 악함을 생각하며 살았다면 아마 암논이 다말을 범하는 것에서 밧세바를 범한 자신의 죄악을 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암논에게서 자신의 악을 보게 되었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신을 징계하는 마음으로 암논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암논의 행위에 대해 노하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이 넘어간 것은 다윗 역시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한 다말은 관심 밖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함은 다말로 인한 노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말로 인한 노함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집안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혹 사회적인 체면과 부끄러움을 먼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유명한 위치에 있는 집안일수록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걸맞은 집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식이 사고를 쳤을 때 노하게 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다수가 자식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 때문에 노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것으로 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는 할지언정 여전히 내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노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대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노함 역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말이 당한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인해 노한 것이 아닙니다. 즉 암논의 행위가 약자를 억압하고 수치스럽게 한 악한 행동이었기에 노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왕의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노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암논을 사랑하기에 노한 것이 다윗이 취한 전부였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암논 사건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암논이 살해당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 살고 무엇을 의식하며 사는가를 깊이 헤아려 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얘기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얘기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복음이, 예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우리들의 삶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현실은 말씀이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때문에 죄에 대해 마음 놓고 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설사 죄에 대해 외쳐진다 할지라도 기분 나빠하기 십상입니다. 이런 것들이 말씀을 대접하지 않고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모습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암논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분명 약자인 다말을 힘으로 취하고 버려 버림으로써 수치를 당하게 한 것에 대해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노한 것이 전부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보존되고 굳게 세워져야 하는 것은 사람도 사람의 체면도 자존심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지 못하거나 가려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면 왕자들이 대성통곡을 하자 다윗도 함께 통곡을 합니다. 그 통곡이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의 집안에 그러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한 통곡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37절을 보면 다윗은 암논을 죽이고 도망을 친 압살롬을 인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리고 39절을 보면 압살롬이 도망을 치고 삼년이 지나자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마음이 간절하였다고 말합니다. 암논이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이미 죽은 암논에 대한 마음이 세월이 지나면서 희미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이 아비의 입장에서는 이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우고 다스려야 할 왕의 입장에서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다만 혈육의 정에 의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13장의 전체 내용은 무너진 다윗 집안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윗조차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히는 것에 대해 무딘 심정으로 자식을 대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말씀이 짓밟힌다면 그 교회는 이미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의 은혜의 정신을 짓밟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해 민감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민감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 노하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노하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 여러분께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전부라면 분명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집안은 하나님의 의가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힘이 난무하면서 힘으로 약자를 정복하고 힘으로 복수를 꾀하는 것만 난무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것이 다윗 집안의 무너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교회는 이미 무너진 교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