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사무엘하 13:30-33 요나답의 계산식

<본문>

저희가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이 곧 일어나서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지고 그 신복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고하여 가로되 내 주여 소년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저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괘념하지 마옵소서 암논만 죽었으리이다(사무엘하 13:30-33)

<설교>

교회를 외적인 규모를 기준으로 하여 큰 교회 작은 교회로 구분하는 것이 세상적 사고방식에서의 계산법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도 과연 그러한 계산법으로 교회를 구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중에는 예배당의 건물과 사람의 수가 들어있겠지만 과연 하나님의 의중에도 건물의 크기와 사람의 수가 들어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사람의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10절을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또한 누가복음 15:7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은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묵살해 버리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보다는 남아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수를 세며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물론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가치가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보다 더하다면 잃어버린 한 마리로 인하여 애가탈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죄인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적 시각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란 것입니다. 그런데 가치가 없는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애쓰고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길 정도로 하나님의 기쁨은 크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심정을 철저히 묵살한 채 세상의 계산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요나답입니다.

3절을 보면 요나답을 간교한 자로 표현하고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요나답은 암논이 다말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 다말을 차지할 수 있는 계략을 일러준 사람입니다. 결국 암논은 요나답의 말대로 시행하여 다말과 강제로 동침하긴 하였으나 그로 인해 다말의 오라비인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 ‘압살롬의 복수’라는 제목으로 지난 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압살롬의 복수는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면 인간의 자존심이 무너지지 아니한 결과였습니다.

사실 복수는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타인에게 복수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대로 복수를 당해야 할 자도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입은 것이 있다면, 나 또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원수 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우리를 오히려 자녀로 삼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존재하고 있기에 사실 신자에게는 ‘복수’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즉 죄인된 자를 찾기 위해 애쓰시고 찾았을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 속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외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여 교회나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에 요나답은 다윗 앞에서 또 한번 간교한 사고방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30절을 보면 “저희가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라고 말합니다. 소문은 항상 부풀려지고 와전되어 전해지기 마련인 것처럼 암논이 죽은 사건도 압살롬이 다윗의 모든 아들을 죽인 것으로 와전되어 전해졌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다윗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인가는 31절의 “왕이 곧 일어나서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지고 그 신복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에게 요나답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주여 소년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저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괘념하지 마옵소서 암논만 죽었으리이다”(32-3절) 요나답의 말은 아들이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암논 한 사람만 죽었으니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몇 명이든지 간에 모두가 다윗의 아들입니다. 어느 자식은 죽어도 되고 어느 자식은 죽으면 안되는 것은 없습니다. 누가 죽는다 할지라도 부모에게는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답은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숫자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전부 죽은 것보다는 하나 죽은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부 죽은 줄 알았다가 하나만 죽었으니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물론 전부 죽은 줄을 알았는데 하나만 죽었다면 ‘불행중 다행이다’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부든 하나든 자식을 잃은 애통함이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답은 자식을 잃은 다윗의 심정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 죽은 줄로 알았는데 하나만 죽었으니 괜찮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심정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답의 간교한 계산식입니다.

이러한 요나답의 간교한 계산식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신자 한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가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교회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식에 의해서 교회의 크고 작음이 구분되는 것이고, 하나님도 큰 교회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선전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보다는 많은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은 간교한 요나답의 계산식입니다. 그러니 비록 하나를 잃었지만 많은 수가 있으니 괜찮다는 말을 하게 될 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성도의 모임입니다. 두 명이 모이든 세 명이 모이든 백 명이 모이든 ‘성도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합니다. 신자는 바로 이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반면에 백 명이 모이든 천 명이 모이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하나님은 교회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요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의 모임이냐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많은 수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간교한 요나답의 계산식일 뿐입니다. 성경 어디에든 하나님이 많은 수의 백성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흔아홉보다 하나를 찾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이 오늘 우리를 찾으시고 살리셨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많은 교회가 기도할 때 ‘빈자리를 채워 달라’고 말합니다. 그 기도의 의도는 예배당을 꽉 채워달라는 것에 있음을 누구나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내 교회가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는 욕심으로 인한 것임을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예배당의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따위의 기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배당의 빈자리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썰렁한 빈 마음인 것이 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빈자리가 많은 예배당이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예수님이 자리하지 않는 내 마음의 상태가 더 크고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요나답은 처음부터 다윗의 마음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암논에게 다말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계략을 일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다윗의 마음을 생각했다면 암논의 다말에 대한 행동으로 인해 다윗이 받아야 할 아픔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암논에게 그러한 계략을 일러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나답의 간교함은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계산과 욕구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굳은 소신은 목사가 만약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한 심령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단체를 바라보게 되면 간교한 요나답의 계산식만 있게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모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목사 개인의 열망과 소망을 채워가는 종교단체로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은석교회가 이러한 교회로 전락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요나답과 같은 계산식으로 교회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스스로 낙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야’ ‘우리 교회는 부흥이 안돼’라는 의식만 남게 될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계산식으로 여러분의 모임을 바라보고 평가한다면 그순간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묵살해 버린 채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사단의 간교함에 놀아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답은 암논만 죽고 다른 아들은 남았다는 것, 즉 많은 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다윗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사단 역시 ‘많다’는 것을 가지고 다가오지 않습니까? ‘많다’는 것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것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만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예수님이 곧 우리의 기쁨인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 심령 하나하나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심령은 하나님의 희생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