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강) 사무엘하 13:23-29 압살롬의 복수

<본문>

이 주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의 양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왕께 나아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컨대 왕은 신복들을 데리시고 이 종과 함께 가사이다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우리가 다 갈 것이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압살롬이 간청하되 저가 가지 아니하고 위하여 복을 비는지라 압살롬이 가로되 그렇게 아니하시려거든 청컨대 내 형 암논으로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저와 함께 보내니라 압살롬이 이미 그 사환들에게 분부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 하거든 저를 죽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맹을 내라 한지라 압살롬의 사환들이 그 분부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사무엘하 13:23-29)

<설교>

주보의 칼럼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이든 동물이든 모두에게는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본능은 자라가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날 때부터 내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본능이 어떻게 해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의 어디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 본질을 드러내는지 과학으로는 도저히 그 내막을 파헤칠 수 없는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능은 때론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생에 대한 본능은 참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배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물들마다 각기 고유의 특징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본능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키우면서 그러한 느낌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자녀를 어릴 적부터 아무리 ‘착하게 살아라’ ‘남에게 나눠주며 살아라’는 교육을 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능은 부모의 교육을 거스르며 그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에게서부터 이미 ‘자신의 소유’를 확실하게 챙기고 지키려고 하는 본능적 활동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빼앗을 때 울음을 터뜨리는 것 역시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여기고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본능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붙들린 채 악의 자식으로 태어나 악의 자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능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수입니다. 본문에 보면 압살롬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면서 암논과는 이복 형제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암논이 범한 다말이 압살롬의 친동생입니다.

22절의 “압살롬이 그 누이 다말을 암논이 욕되게 하였으므로 저를 미워하여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니라”고 언급한 것처럼 압살롬은 다말에 대한 암논의 행위를 알고 그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압살롬이 잘못한 것입니까? 성경을 기준하여 생각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생각에 압살롬이 암논을 미워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의 여동생이 누군가에게 다말과 같은 일을 당했다면 압살롬과 같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압살롬이 암논을 미워하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나 우리나 똑같이 아담의 자손들이고 같은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압살롬과 같은 본능을 가진 인간이기에 얼마든지 압살롬이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압살롬의 그와 같은 마음을 이해하시고 받아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수치와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는 자들을 향해 미움과 복수를 뱉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찌르고 죽이는 자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전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압살롬의 미움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마음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봄으로써 신자가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압살롬은 복수를 위해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양털 깎는 날에 왕과 왕의 모든 아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이 주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의 양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왕께 나아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컨대 왕의 신복들을 데리시고 이 종과 함께 가사이다”라고 말합니다.

목축업이 주된 생업이었던 당시 사회에서는 양털을 깎는 일은 큰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은 농부가 곡식을 수확하는 추수의 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의 모든 아들과 왕을 초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초청을 다윗은 압살롬에게 누를 끼칠까 한다는 말로 거절합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그러면 암논을 보내 달라’고 요청 합니다. 암논이 다말에 한 행위를 알고 있는 다윗이 암논의 안위가 염려 되었는지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라는 말로서 거절하나 결국 계속된 압살롬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암논과 모든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사환들에게 지시하여 암논이 술에 취해있을 때 그를 죽이게 됩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복수혈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압살롬에 대해 ‘복수는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복수를 한 압살롬은 나쁜 사람이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복수의 행위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로서 본문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아닌 자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대하면 안됩니다. 신자란 십자가를 앞에 세워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살아가는 신자의 입장에서 압살롬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무엇이 정당한 것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복수심은 누구든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심이란 무엇입니까? 해를 받은 본인이나 가족 또는 친구가 가해자에게 당한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즉 어떤 해를 입었을 때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복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복수의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수시로 복수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단순히 복수를 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왜 잘못된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복수심이 일어난다는 것은 여전히 ‘나’라는 자아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기에 복수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손해를 당하면 안된다’ ‘나는 자존심을 상하면 안된다’ ‘나는 남에게 지면 안된다’는 자아의식이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는 손해를 보면 안되는데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가 있을 때 받은 손해를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는 이것이 곧 복수심입니다. 자신은 자존심이 상하면 안되는 누군가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때 나 역시 그 사람의 자존심을 무너뜨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욕구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복수심입니다. 그러므로 복수를 행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수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수를 행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수심이 십자가 앞에서 문제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신자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예수님이 피흘리고 죽으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면 그는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못 박히지 않은 십자가를 앞에 세워두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앞에 정직하게 서 있다면 자기 자신, 즉 자아가 살아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부정되고 무너지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앞에서는 ‘나는 손해 보면 안된다’는 자의식이 용납될 수 없음을 아는 그가 신자이며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일 없이 잘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멸망 안에 있는 것이고, 영원한 고통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고, 소유가 얼마가 되던 그 모든 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멸망의 자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손해 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손해’라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있을 때 해당되는 것입니다. 손해 볼 무엇인가가 내게 있을 때 성립이 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는 여러분의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과연 여러분의 소유입니까? 비록 세상의 규칙과 법이 우리의 소유에 대해 인정한다 할지라도 ‘나의 소유’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이 여러분의 소유라면, 여러분은 그 소유를 여러분의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수중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원하든 원치 않든 내게서 떠나기도 하고 내 수중에 들어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손해 봤다’는 의식은 우리의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가는 우리의 입술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결국 말뿐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 삶이 수정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소유가 없음을 알았다면 ‘손해 봤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복수심을 다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소유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복수심 역시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서게 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애원을 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십자가가 소중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까?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볼 수 있는 십자가는 단지 자신을 천국에 보내주는 십자가일 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는 십자가란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기에 ‘자기 부인’도 요구되지 않는 십자가입니다. 그저 믿으면 복주고 천국 보내주는 십자가인 것이죠.

인간의 욕구는 이런 십자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와 자기 생각으로 찾을 수 있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이 세워둔 십자가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는 나의 의지로 선택하거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심으로써 사랑과 자비하심을 입어서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 선 신자는 무엇 하나 자신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삶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세상 역시 나의 힘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 하나 나의 것, 나의 힘이 없음을 알게 됨으로써 남보다 잘돼야 한다거나, 지면 안된다거나 손해를 보면 안된다는 당위성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닫는 이것이 복수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의 복수심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결과임을 생각할 수 있고, 결국 복수를 했다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보지 않는 이방인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는 잘못됨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복수심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에게서 복수심이 보인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에 여러분의 소유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나의 소유는 없다’는 새로운 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이러한 의식이 있을 때 세상에서 크게 되고, 남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는 모든 생각들까지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복수심의 길을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복수에는 단순히 다말에 대한 복수만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5정에 보면 압살롬은 다윗에 대해 반역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그는 이미 다윗의 왕권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의 첫째 아들이 암논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유리한 위치를 얻기 위한 계획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권력에 대한 욕심이 복수님과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수를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어를 보면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처럼 우리의 신앙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형편에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때그때 다른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절대 불변입니다. 오직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마음이 십자가를 향하는 것 같다가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왜 이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할까요? 그것은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에 있는 긍휼과 사랑과 자비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이 없는 십자가입니다. 구원의 기쁨이 없기에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 생각이 복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자입니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어떤 조건 대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구원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자리에 집어넣으시는 의지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뭐가 부족합니까?

세상의 것이 많이 있어서, 권력을 차지함으로써 천국에서 달리 대접 받는 것이 있다면 가난이 부족함이 될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것으로는 천국에 들어올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돈으로 못가는 천국을 긍휼과 사랑으로 들어간 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돈으로 자신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천국을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기쁨을 발견하십시오. 왜 십자가가 고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행복으로 이어지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과연 십자가에서 무엇을 누리고 있는가’를 심도 있게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일이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총과 감사와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여러분에게 복수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알게 할 것이고, 복수를 벗어난 신자로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